해파랑길 22코스(축산항 - 고래불해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해파랑길 22코스는 영덕의 축산항을 출발하여 대소산봉수대를 거쳐 전통마을로 유명한 괴시마을을 지나 고래불해변으로 가는 16.1km의 길이다. 출발지인 축산항에서 대소산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숨울 고르며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축산버스 정류소 옆에 있는 22코스 인증대
이 코스의 시작은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와우산을 올라가면서 시작한다. 영덕블루로드 길과 함께 가는 길이다. 와우산으로 올라가면 여러 문중의 비석과 비각 등이 많이 보이는 것이 이 길의 특징이다.
와우산 올라가는 길 입구
와우산에서 보는 죽도산전망대
월영대와 일광대 표석
일광대의 한문 내용 번역비
대소산봉수대 가는 길
와우산을 지나 대소산봉수대를 향해 가는 길은 제법 힘이 드는 산길로 대소산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오래전부터 축산에서 영해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한다. 또한 대소산은 그 자체가 영덕의 숨은 일출 명소 중의 하나이며,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영덕의 블루로드, 특히 축산항을 뒤로 하며 오르는 블루로드 C코스는 대소산을 첫 경유지로 향한다.대소산은 높이가 얼마 되지 않는 산이지만 일반적인 산과 갈리 해안에서 바로 산의 표고가 잡히기 때문에 가파른 산길은 보통의 산 높이로 오산을 하면 안 된다. 이 길에서 나와 같이 해파랑길을 걷는 중년의 사나이를 만났다. 울산에 집이 있는데 부산 오륙도에서 출발하여 쉬엄쉬엄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 하였다. 오늘은 영해까지 간다고 하여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먼저 발길을 재촉하여 제법 땀을 흘리고 봉수대에 도착했다.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릴 수 있게 설비해놓은 곳으로, 밤에는 햇불[烽],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변방의 동태를 중앙으로 알리던 통신시설이다. 대소산 봉수대(大所山 烽燧臺)는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리(陶谷里)에 있는 해발고도 282m인 대소산에 있는 봉돈 높이 2.5m, 지름 11m의 조선 초기의 봉수대로 남쪽으로는 별반(別畔) 봉수대, 북쪽으로는 평해의 후리산(厚里山) 봉수대, 서쪽으로는 광산(廣山) 봉수대를 거쳐 진보(眞寶)의 남각산(南角山) 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영덕 축산포(丑山浦) 방면의 변경 동태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남산(南山) 봉수대까지 알리던 지방 봉수였다. 대소산 봉수대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대소산봉수대의 모습
대소산봉수대에서 보는 동해
대소산봉수대를 벗어나 산길을 계속 걸어 목은 이색의 사당을 지나 전통마을인 괴시마을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목은 이색의 사당과 괴시마을의 여러 세부적인 사진은 생략한다. 왜냐하면 나의 불로그에서 괴시마을을 찾아보면 많은 사진과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십여 년 전에 이 마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좋은 기억을 가졌고, 그 때의 일을 마을 곳곳의 사진과 집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괴시마을로 가는 산길
괴시마을 입구에서 만난 꼬마들
괴시마을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로, 고려 말의 대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선생’으로 알려져 있는 목은 이색의 탄생지로 알려진 조선 후기 만들어진 양반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전통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인데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고 한다. 마을의 가장 높고 아늑한 땅을 잡아 이색의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었다. 괴시마을은 한옥과 부드러운 논밭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전통 마을이다. 부드러운 능선으로 감싸 안긴 마을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궁이의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괴시마을은 고려 말에 함창 김씨가 처음 터를 잡으면서 생겼다. 함창 김씨는 목은 이색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가 지금 괴시마을 이루고 사는 영양 남씨다.
멀리서 보는 괴시마을
괴시마을을 벗어나 대진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해안길을 다라 계속 걸어가야 한다.
관어대(觀魚臺)는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동쪽에 있던 누대의 이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색(李穡)과 김종직(金宗直)의 부(賦)가 전해지고 있다.
길을 가면서 보는 오징어 건조
계속 길을 걷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추모 정자인 도해단을 발견하여 발을 멈추고 주변을 구경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차츰 흥미를 가지고 구경을 하고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조사를 해 보았다. 이런 인물이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다.
의병장 김도현을 기리는 정자
김도현(金道鉉)은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투신자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도현은 1896년 2월 유시연(柳時淵)과 함께 영양·안동(安東) 지방의 의병을 모아 경북 봉화군 청량산(淸凉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그리고 안동으로 진군하였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세가 의병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자 벽산은 1896년 9월 의병을 해산하고 산중에 은거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이에 반대하는 상소가 이어졌고 벽산은 이듬해 1906년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거병하였다. 하지만 벽산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벽산은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감시가 심했고 더구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마저 세상을 뜨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영해의 관어대(觀魚臺) 앞바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저서로 《벽산 선생 창의전 말(碧山先生倡義顚末)》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두산백과에서 요약)
대진항에서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여 걸어 대진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해수욕장 뒤에는 갯골을 건너는 운치 있는 ‘고래불대교’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고래불해수욕장의 남쪽 끝이다. 이곳부터 음악분수와 돌고래조형물이 있는 고래불해수욕장의 북쪽 끝까지 약 4.5km다. 백사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그 뒤로 소나무 숲도 4km에 걸쳐 이어진다. 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소나무 숲은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이다.
고래불해수욕장 풍경
고래불 국민야영장 모습
이 고래불해수욕장 가까이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한 오십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혼자서 힘차게 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광명에 산다고 하며 해파랑길 종주를 하는 중이라 하였다. 물론 한 번에 모두를 걷는 것은 아니고 나와 같이 시간이 날 때마다 구간을 나누어 걷는다고 하였다.
같은 길을 걷는 동지라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여인은 고래불해수욕장 주변에서 걸음을 멈추고 숙박을 한다고 하였다. 나는 좀 더 길을 걸어야겠기에 인사를 하고 다시 23코스의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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