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4 (괴레메 야외박물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제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이다.

 

 그 동안 유보해 놓았던 괴레메야외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괴레메야외박물관은 괴레메시내에서 얼마 멀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 특기를 살려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갔다. 몇 일간을 보는 풍경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기이하게 보이고 우리 지구행성의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것같은 기분이 든다. 여떻게 이런 자연이 만들어졌을까?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할 뿐이다. 거대한 자연에 비해 조그마한 미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놀랄 뿐이다.

 

 야외박물관까지 계속 보아왔던 광경을 또 다시 보며 한가로이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야외박물관에 도착했다.(빨리 걸으면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카파도키아에 오는 관광객은 다른 곳은 안가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간다. 그러다 보니 비수기이지만 너무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파도키아 기독교의 성지 괴레메야외박물관에는 평균 30m 높이의 돌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초기 기독교시대부터 신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곳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돌기둥을 파서 교회와 거주공간을 만들어 생활했다. 이 곳에는 365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약 30개의 교회가 공개되고 있다. 교회의 모양은 카파도키아의 동굴교회와 비슷하고 단순하지만 이곳의 내부 벽에는 예수의 생애 등을 기록한 프레스코 벽화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 시대의 십자가와 천국의 대추나무, 석류와 신앙고백의 상징인 물고기 그림 등이 많이 있다. 8-9세기의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은 성화가 파괴되었다가 다시 그위에 나무나 기하학적 문양, 물고기 등 여러 문양을 그렸다가, 중세이후 다시 성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프레스코 성화가 가득한데 내부사진을 찍지 못하게 막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저 눈으로만 보고 다시 오라는 것같다. 물론 성화를 보존하기 위한 한 방법이지만 관람을 하는 나는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크다.

 

 

괴레메야외박물관 전경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보는 풍경

 

 

 

괴레메야외박물관 주변 모습

 

 

괴레메야외박물관 표지

 

 

괴레메야외박물관 수도원과 교회 설명도

 

 

 

성 바실리오스 예배당 설명

 

박물관 입구쪽에 있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다. 장식이 거의 없고 예수의 상반신이 그려진 프레스코가 있으나 많이 퇴색해 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 성화에 대한 설명판

 

 

 

사과교회의 설명(성화도 게시해 놓았다)

 

 사과교회라는 명칭은 내부에 있는 성화에 사과 모양의 둥근 물체를 쥐고 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사과 모양이 지구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성 바르바라예배당 설명

 

 

바르바라예배당

 

 바르바라는 전설적인 가톨릭 성녀로 3세기경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일설에는 히에라폴리스)에서 출생했다 한다. 이교도인 디오스코루스의 딸로, 그녀는 306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며, 순교 장소는 여러 곳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없다. 바르바라가 실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그녀에 관한 전설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1969년부터는 교회력에 그녀의 축일이 삭제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미모인 까닭에 이교도인 부친 디오스코루스에 의해 탑에 유폐되었으나 탑 내에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개의 창을 탑에 뚫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사실을 알자 분노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고, 아버지에 의해 재판관에게 넘겨져 배교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직접 바르바라를 참수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안에는 바르바라의 모습이 프레스코로 남아 있다.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교회인듯????

 

 

아마 식량 창고였던 것 같은데.....

 

 

뱀교회 설명

 

뱀교회라는 이름은 성 요르기오스와 성 테오도로스가 뱀과 싸우는 벽화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찍은 사진인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암흑교회 설명

 

암흑교회의 벽화는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암흑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덕분에 프레스코가 거의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통제를 한다.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이 살짝 눈을 피해가며 찍기도 하지만 눈으로만 보고 즐긴다.

 

 

 

 

샌들교회 전경

 

 

 

 

샌들교회 설명

 

 2층 구조의 교회로 철계단을 올라가서 2층을 구경한다. 예수 승천 벽화 아래에 발자국 모양이 남아 있어 샌들교회라 일컫는다. 여러 벽화가 그려져 있고,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샌들교회

 

 

 

 박물관에서 보는 풍경

 

 괴레메야외박물관을 구경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여러 프레스코를 보았는데 사진을 전혀 찍을 수가 없어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 물론 보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특히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은 기억의 한계가 있어 사진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성화들의 프레스코는 그 순간이 지나면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 박물관의 교회나 예배당 등의 입구의 설명판에는 그 곳의 유명한 프레스코를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 설명판을 찍은 사진으로라도 만족해야 한다. 생각보다 아직 괴레메야외박물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어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괴레메 중심지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유럽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들은 아침을 상당히 늦게 시작하고 밤 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긴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생활습관이다. 우리는 점심 때가 되어서 식당에 갔으나 아직 사람들이 거의 없다. 점심을 주문하고 아들과 다음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음식이 나와 밥을 먹는다.

 

 

 

 

식당의 전경과 내부

 

 

 

 

 

 

 

 밥을 먹고 다음 여행지로 가지 전에 아들녀석의 신발을 사러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스에서 좀 말썽이었던 신발이 드디어 신을 수가 없게 되었다. 조그마한 시내라 신발을 파는 집이 거의 없었다. 계속해서 걸어 다니며 가게를 찾으니 한 집에 신발이 보인다. 들어가니 다행히도 아들의 발에 맞는 신을 구할 수가 있었다. 신을 구입하고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서 나와 버스를 타러 간다.

 

 드디어 꿈에서도 갈망하던 트로이로 간다. 이 카파도키아에서 트로이가 있는 차낙 칼레로 가는 방법으로 우리는 앙카라를 거쳐 가기로 했다. 그래서 앙카라가지는 버스로 이동하고 앙카라에서 차낙 칼레는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좀 번거롭지만 이 여정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선택했다. 조금은 먼 거리를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땅이 아니고 교통도 우리나라만큼 잘 발달해 있지도 않은 곳이다.

 

 어려움이 있지만 내일은 트로이를 볼 것이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3 (그린투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어를 따라가는 여정을 택했다.

 

 카파도키아는 너무나 넓고 명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대중교통도 발달하지 않아서 자신이 차를 운행하지 않으면 투어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투어의 종류로는 조금 먼 곳을 가는 그린 투어, 우리가 어제 걸었던 코스인 레드투어, 그리고 가까운 로즈 밸리를 트레킹하는 로즈밸리투어, 발룬을 타는 발룬투어 등이 있어 각자의 여정에 맞추오 이용하면 된다.

 우리는 첫날에는 투어를 선택하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여러 명소를 구경하였고, 괴레메 야외박물관을 가는 여정도 우리 일정에 맞추어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나머지 코스는 걸을 수 없는 먼 곳에 위치하기에 할 수 없이 그린투어를 선택했다. 투어 버스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면 관람만 하면 되는 편리한 여정이다.

 

 아침 일찍 발룬을 타고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고 투어 버스를 타고 맨 처음 도착한 곳이 데린쿠유 지하도시다. 이 데린쿠유는 히타이트시대부터 비잔틴까지 지하도시가 만들어졌는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역사학자 크세노폰의 언급이 있으나 정확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의 어느 날, 마을에서 닭 한 마리가 작은 구멍 속으로 빠졌는데 나오지 않자 주인은 땅을 파기 시작했고, 뜻밖에도 그 아래에서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큰 지하동굴이 발견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인근의 지하도시가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했고 유네스코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민간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지역 데린쿠유 행정구에 있는 개미굴처럼 지하 곳곳으로 파내려간 깊이 약 85m 지하 8층 규모의 거대한 지하도시이다. 현재 발굴된 깊이가 지하 8층인데 아직도 더 깊은 곳을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 통로와 환기구가 지하 각층으로 연결돼 있고 교회와 학교, 그리고 침실, 부엌, 우물 등이 존재한다. 이 곳은 지하로 계속 파 내려갔기 때문에 지금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으나 최대 5만 명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큰 곳이다.

 

 터키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많은 지하도시 중에서(지금까지 40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곳으로, 최초의 터널과 동굴들은 4천 년이나 그 전에 처음으로 파였던 듯하며, 기원전 700년에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처음에는 이 땅의 정착민들은 혹독한 날씨를 피해 기꺼이 지하로 들어가 보호를 받았지만, 그 뒤에는 종교박해를 피해 온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7세기부터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은신하려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곳에서 현재 발견되는 거주지 유적은 모두 AD 5~10세기의 중기 비잔틴시대에 속하는 것들이다종교적인 신념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감수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할뿐이다.

 

 내부에는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덩이로 통로를 막을 수 있게 하였고 독특한 기호로 길을 표시해 침입자는 길을 잃도록 여러 갈래의 통로를 뚫어 놓았다. 현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화살표로 길 표시를 선명하게 해 놓았다. 화살표를 따라 가며 안내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괴레메파노라마에서 보는 괴레메의 전경

 

 

 

데린쿠유입구

 

 

 

 

 

 

 

 

 

 

 

데린쿠유의 여러 모습

 

 

데린쿠유지하도시의 전체 모형도

 

 데린쿠유를 구경하고난 뒤 으흘라라 계곡의 끝 부분에 있는 셀리메 대성당(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식 명치은 성당이다)으로 간다. 셀리메 대성당은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동굴집이다. 동로마시절 기독교 박해를 피해 찾아온 신자와 성직자가 살았던 곳으로 실크로드를 이용하던 상인들도 여기서 묵고 갔다고 한다.

 

 개미집 같기도 하고 지상에 올라온 지하도시 같기도 한 이곳의 여기저기 뚫려있는 구멍은 각자의 방으로 사용하던 구멍이었다. 천정에 구멍을 뚫어 창과 환풍구로 사용하고 벽에는 홈을 파서 비둘기의 집으로 사용했단다. 왜냐하면 이들은 비밀리에 통신을 하는 수단으로 비둘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예배당이 있는데 굴을 파고 그 안에 2층짜리 교회를 만든 것이 놀랍다.

 

 전에는 6층까지 개방했다 하는데 이곳이 좀 미끄럽기에 낙상사가 있은 후로 3층까지만 개방한다고 한다. 실내로 들어가서 바깥을 보면 자연스럽게 뚫린 동굴의 입구가 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계곡의 자연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하늘과 자연을 보고 살았으니 데린쿠유지하도시 사람들보다는 더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즈막한 기둥을 따라 깨알같이 새겨놓은 성인들의 그림과 벽화들은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8세기경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너무 아쉬웠다.

 

 

 

셀리메 대성당 표지

 

 

 

 

대성당의 전경

 

 

 

 

여러 곳의 모습

 

 

 

 

셀리메 대성당에서 보는 풍경 - 푸른 하늘이 너무 맑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머랄드나 사파이어와 같이 파란 하늘로 슴을 탁 트이게 하는 하늘이다.

 

 

 

 

암굴의 내부

 

 

물고기 문양이 그려져 있는 입구

 

 

 

 

교회의 내부 - 벽화가 퇴색되어 그 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셀리메 대성당 곳곳의 모습

 

 

 셀리메대성당을 나오니 점심 때가 되었다. 투어를 따라 다니기 때문에 주는대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점심을 먹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가 머문 숙소에 아침에 보니 한국 아가씨가 있었는데 투어도 같이 하게 되어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연말에 터키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서른은 되지 않은 듯한 나이인데 얼굴이 우수에 젖어 있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 아가씨와 투어를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점심을 먹은 식당과 점심

 

 점심을 먹고 으흘라라 계곡으로 갔다. 으흘라라 계곡은 물이 흐르고 초록의 숲이 있는 곳이다. 카파도키아는 붉은 바위와 기이한 버섯 모양의 바위 집들로 우주의 어느 행성 같은 비현실적 도시인데 이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모습이다. 100~200m에 이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같이 늘어선 이런 협곡이 16km가량 이어진다는데 오르막이라고는 없는 걷기 좋은 길이다.

 

 카파도키아 곳곳이 초기 기독교시대에 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이곳도 주변에는 5000호의 주택과 105곳의 교회 흔적이 남아있다. 트레킹 출발 지점에 있는 아가칼티교회 벽면에는 그리스도 승천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트레킹은 멜렌디즈라는 이름의 제법 큰 하천을 따라 걷는다. 겨울이지만 물이 얼지 않고 흐르며, 주변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여러 가축들도 만난다. 카파도키아에서 항상 건조한 동굴 집만 보다가 물과 숲을 만나니 마음이 조금은 촉촉해지며 여유로워진다.

 

 이 계곡에서도 사람들이 동굴에 살았던 흔적으로 절벽에 구멍들이 보인다. 아래쪽 큰 구멍에는 사람이 살았고, 위쪽 작은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비둘기 고기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됐고, 비둘기 배설물은 프레스코화의 회벽을 만드는 데 쓰여 지금까지도 선명한 색상을 유지하는데 일조했다. 비둘기 배설물은 비료와 연료, 무기를 만드는 데도 사용됐고, 비둘기 알의 흰자는 벽화를 코팅하는 데 쓰였다 하니 당시엔 비둘기가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던 셈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이지만 으흐랄라 계곡은 봄기운이 완연한 한국의 어느 뒷산에 오른 것 같은 풍경으로, 한쪽으로 흐르는 개울물과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산책을 하는 듯한 장소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두어 시간 정도를 걸으니 이 계곡 트래킹은 끝나고 다시 뾰족 솟아오른 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담을 하나하면 이 계곡을 걸어가는 도중에 앞에서 오는 젊은 남녀가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훤출한 키에 아주 선량하게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웃음이 너무 예뻤다. 생긴 모습도 아주 착하게 보이는 눈에 뜨이는 미인이었는데 마음도 아주 착한듯 했다. 무언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나프폴리오에서 보았던 중국여인은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었고 오늘 길에서 만난 아가씨는 사람을 아주 편안하게 해 주는 미인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주 상쾌한 일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찍은 풍경 - 저 멀리 산위에는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다.

하늘은 너무 푸르다.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계곡입구에서 계곡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프레스코 벽화가 제법 선명한 조그마한 암굴교회를 만난다. 그리스도의 승천이 그려져 있는 아아찰트교회이다. 조그마한 교회라 잠깐 구경하고 내려가면 계곡을 접한다. 계곡은 우리나 여기나 비슷하다.

 

 

계곡 설명도

 

 

 

 

 

 

으흘라라계곡 입구 주변 - 깍아지른듯한 암석들이 보인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 - 오염원이 없어 맑은 것 같다.

 

 

 

 

계곡입구의 여러 모습 - 암벽 중간에 옛날에 사람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인다.

 

 

으흘라라계곡에서 갈 수 있는 곳의 이정표

 

 

 

 

 

계곡 중간중간의 여러 모습

 

 이 계곡은 아주 평탄한 길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전혀 무리가 없이 누구든지 쉽게 걸을 수 있다. 중간에는 찻집과 휴식처 그리고 식당도 마련되어 있으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한가로이 거닐면서 여유로움을 즐기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 좋은 길을 조금 급하게 걸었다. 투어를 따라 왔기에 시간을 어긋날 수는 없기에......

 이런 점이 내가 투어를 하지 않는 이유인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옛날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있었다는 거주지

 

 기분 좋게 으흘라라계곡 트래킹를 마치니 버스가 우리를 기념품과 보석을 파는 가게로 인도한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과정이다. 우리는 물건을 살 계획은 전혀 없으므로 구경만 하고 거기에서 주는 차를 마시고 나왔다. 가게를 나와서 간 곳이 석양의 아름다운 괴레메를 볼 수 있는 피전밸리전망대인 괴레메 파노라마다.

 이곳에서는 괴레메의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어제 걸어 다니면서 보았던 풍경들.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로즈밸리나 레드밸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괴레메를 일망무제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 괴레메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피전밸리전망대에서 괴레메파노라마를 보는 풍경

 

 

 

 

 

 

 

 

피전밸리전망대 괴레메파노라마의 일몰 풍경

 

 서서히 해가 진다. 아침에는 발룬을 타고 하늘에서 해가 떠는 광경을 보았는데 저녁에는 땅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본다, 하늘에서 보았던 괴레메의 풍광을 이제는 땅위에서 전체를 다시 본다. 걸어 다니면서 보는 풍경은 자세히 볼 수 있으나 전체를 조망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하늘에서나 이 피전밸리전망대에서 괴레메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서 좋다. 나무를 보아야 좋은 것도 있고, 숲을 보아야 좋은 것도 있다.

 

 

 

나자르 본주우 ( 터키어: Nazar boncuğu )

 

 이 전망대의 가게 앞의 나무에 푸른 빛을 띤 사람의 눈 모양의 물건이 달려 있다. 터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푸른 빛깔의 물건은 나자르 본주우(터키어: Nazar boncuğu)로 사람들의 불행을 막아준다는 터키의 부적이다. 푸른 유리에 눈이 그려져 있으며, 재앙을 물리친다고 한다. 터키의 대표적인 기념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악마의 눈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해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은 부적을 만들었다. 세상 어디에서나 원시 샤마니즘 사회에서는 이같은 부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여러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었지만 지금은 대개가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자신을 지켜주는 나자르 본주우 를 하나쯤은 골라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발룬을 타느라고 바쁘게 움직였고 또 먼 곳을 투어를 따라 다니며 여러 곳을 구경하고 난 뒤에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들은 먹는 것을 엄청 중시한다. 그래서 구글에서 그 지역의 특색있는 음식점을 항상 검색하여 나에게 가자고 한다. 나는 따라가서 맛있게 먹고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식당의 외부와 내부

 

 

 

터키는 이슬람 국가지만 주류도 있어 비교적 자유롭다. 곳곳에서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식당에서 팔지는 않는다.

 

 

 

 

유명한 항아리케밥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카파도키아를 여행할 때 꼭 먹어본다는 항아리 케밥이다. 원래 명칭은 Testi Kebap이다. 이 음식은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고기나 야채들을 함께 넣고 푹 끓여내는 음식이다. 지금은 카파도키아의 명물음식이 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식성에 잘맞는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이 있어야 밥을 잘 먹는데 항아리속에서 푹 고아지면서 국물이 흥건하게 생긴다. 밀봉된 항아리를 뚝 깨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저녁식사

 

 

 저녁을 먹고 시내를 좀 배회하니 아직은 비수기라서 관광객이 적어 시내가 좀 하가하다. 이곳 저곳의 가게를 눈으로먼 쇼핑을 하다가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발룬을 탔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한 하루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2 (열기구, 발룬투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높이 나는 새가 더 많은 곳을 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제 타지 못했던 터키여행의 백미라 일컫는 발룬(열기구)을 타기 위해 다시 셔틀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카파도키아에만 무한정 있을 수 없기에 우리가 카파도키아에 있는 동안 발룬을 타야 한다. 날씨는 상당히 좋아 기대를 하고 현장에 가니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발룬을 운행하는 사람들도 준비를 시작한다. 다행히 오늘은 발룬이 운행된다고 한다. 발룬이 가스를 주입하는 동안 발룬을 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차와 약간의 주전부리를 준비해 놓고 있다. 차를 한잔 마시고 쿠키를 몇 개 먹고 주변을 돌아보니 준비하고 있는 발룬이 엄청 많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도 백개는 넘는 것 같다.

 

 발룬은 서너명이 타는 것이 아니라, 한 발룬에 20명이 탄다. 이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발룬은 높이 떠오르면 약 400m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공중에 높이 올라가므로 옷을 두껍게 입고 발룬을 탔다. 허공은 상당히 추웠다. 이 발룬의 운행은 계절에 따라 사간이 다른데 그 이유는 발룬을 타고 하늘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발룬은 한 시간 가량을 운행하는데 카파도키아 일대를 하늘에서 한 시간 구경하면 자연의 풍경은 거의 다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보았던 기괴한 모양의 암석군들, 카파도키아 평원, 아름다운 카파도키아의 계곡들 등등 카파도키아의 절경을 하늘 위에서 보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으며, 하늘 위에서 일출을 보는 기분은 말로는 설명할 할 수 없고 직접 그것을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이 발룬투어는 여러 곳에서 예약을 할 수 있지만 숙소에서 예약을 하는 것이 교통편이나 다른 서비스측면 등 여러 면에서 가장 좋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 발룬을 타고 어린 아이같이 기쁘하며 즐거워한다. 우리가 탄 발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탔는데 중국인 특유의 떠들석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발룬을 조종하는 일명 조종사들은 능숙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카파도키아를 한바퀴 도는 것 같았다.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는 사람은 하늘 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발룬을 꼭 타 보는 행운을 가지기를 빈다.

 

 첨언하면 터키를 여행하는 도중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만나서 이야기했다. 그 젊은이들이 카파도키아를 거쳐 왔다고 해서 발룬을 탔느냐 물으니 못탔다고 했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12월 26일에 발룬이 뜨고 그 뒤에는 한번도 뜨지 않았다고 하면서 현지인들이 당분간 발룬운행이 어려울 것이라 하더라고 전했다.

 

 바로 그 12월 26일 오늘이 내가 발룬을 탄 날이다. 나의 여행에 행운이 따랐다.

 

 

카파도키아 하늘을 수놓고 있는 발룬들

 

 

 

 

발룬을 띄우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하늘로 떠오르는 발룬들

 

 

 

 

 

 

하늘위의 발룬들

 

 이 발룬을 타고 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이구동성으로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너무 편안하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움직임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하늘에 올라가서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조종사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인다. 우리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된다. 물론 조심은 해야 한다. 아무런 보조장치가 없이 하늘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늘에 올라 얼마나 많은 발룬이 떠 있는지를 대강 헤아려 보았다. 적어도 300내지 400개 정도가 눈에 보였다. 엄청난 수의 발룬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물론 하늘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작지만. 그래서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발룬이 한번 뜨면 얼마나 이 동네에 수입이 될까?하고 한 발룬에 20명씩 탄다. 약 400개의 발룬이고 한 사람당 130유로다. 간단하다. 20×400×130 유로이다. 약 100만유로이다. 우리 돈으로 약 13억이다. 물론 매일 이렇게 많이 떠는 것은 아니겠지만..... 뒤에 알았지만 오늘이 전에 발룬이 뜨지 못해 손님을 다 모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돈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엄청난 수입을 보장하는 관광 아이템이다.

 

 하늘에서 카파도키아를 즐겁게 구경하고 있으니 동쪽에 붉은 기운이 비친다. 일출이다. 하늘위에서 보는 일출이다. 해가 이렇게 뜨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룬은 일기가 좋은 날에 운행을 하며 일출시간에 맞추어 비행을 한다. 이들이 관광객을 위한 마음씀이 갸륵하다고 생각되었다.

 

 

 

 

 

 

 

해뜨는 카파도키아의 하늘 

 

 

 

 

 

 

 

 

 

 

 

하늘에서 보는 카파도키아 동영상

 

 

 

 

 

 

 

 

 

 

 

발룬에서 보는 카파도키아의 자연 풍경

 

 발룬을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아주 능숙하여 우리가 아주 편안하게 카파도키아의 자연 풍경을 볼 수 있게 한다. 암석 가까이에도 비행하여 암석군을 자세히 보게 하기도 하고, 멀리서 계곡을 보게도 한다. 따로 다른 투어를 따라 가면서 카파도키아의 자연을 구경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세밀한 자연 풍경은 가까이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먼 원경은 하늘에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하늘에 떠 있는 발룬들

 

 

 

 카파도키아의 하늘을 비행기 창이 아니라 직접 발룬에 타서 호흡하며 온몸으로 공기를 숨쉬면서 보는 풍경은 장관이다. 밑을 보면 카파도키아의 자연이 색다르게 보이고, 하늘을 보면 푸른 하늘과 그 곳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발룬들을 보는 것이 더 장관이다. 수백개의 발룬이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을 보라. 사람들은 발룬이 몇 개 정도 떠올라 그냥 선회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 이렇게 많은 발룬이 떠오르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어와서 사진을 보여 주니 모두들 감탄을 한다, 이렇게 많은 발룬이 떠 오르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하늘에서 발룬을 보는 것이 더 장관이겠다고.....

 

 

 

 

운행을 마친 발룬이 착륙하는 모습

 

 

 

 발룬을 타고 나면 발룬 운행회사에서 간단한 다과와 샴페인을 준비해 놓고 축하를 해 준다. 물론 약간의 상술이 포함되어 있지만 샴페인을 한 잔 주고 팁을 넣는 통을 준비해 놓고 있다. 절대 강요는 아니니 주고 싶으면 자기가 알아서 주면 된다.

 

 

 마지막 정리를 하고 셔틀을 타려고 하니 이름을 부른다. 봉투를 하나 주기에 무엇인가 받아보니 발룬을 탔다는 증명의 사진이다. 아주 재미있는 장사다. 관광객들에게도 추억이 되고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그만큼 발룬을 탄다는 것은 행운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발룬만 타려고 무작정 카파도키아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발룬을 탄 것이 이번 여행에서 재미있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이글을 쓰고 있는데 뉴스에서 제주도에서 열기구가 추락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그 뉴스를 보면서 카파도키아를 생각했다. 별로 기상 상태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는데 비행할 수 없다며 거의 한달에 하루 정도밖에 운행하지 않는 그들은 얼마나 안전을 우선하는지를 또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아들과 함께 터키문명 산책 - 카파도키아 1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스문명을 보고 싶으면 그리스보다 터키를 가라고, 그만큼 터키에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자취가 그리스보다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터키에 왔다.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터키의 카이세르공항에 도착했다. 교통편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아침에 크레타에서 아테네로 비행을 하고 다시 이스탄불을 거쳐서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르 공항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카파도키아는 내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일정을 짜는 아들에게 강권하여 넣은 코스다. 내가 꼭 가야된다고 한 곳이 바로 이 카파도키아와 트로이다. 아들은 처음에는 이미 계획이 다 짜였다고 불평을 했으나 아버지의 요청을 수락하여 계획을 다시 수정하였다.

 이런 점이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고맙다.

 

 카파도키아는 너무 넓기 때문에 숙소를 잘 정해야 한다.

우리는 괴레메에 숙소를 정하였으므로 공항에서 괴레메로 숙소를 찾아가니 먼저 카파도키아에 가면 꼭 해야 되는 발룬 투어를 신청하라고 한다. 한 사람당 130유로라는 적지 않은 돈을 달라고 하지만 카파도키아에서 발룬을 타지 않으면 어디에서 발룬을 타겠는가? 죽기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카파도키아 발룬 타기라고 모든 여행안내서나 사이트에서 떠들고 있다. 얼마나 좋은가를 직접 타 보아야 한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발룬을 타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한다. 아들은 처음부터 자기는 고소공포증이 좀 있어서 타지 않겠다고 했으나 애비가 여기에서 발룬을 타지 않는 것은 앙꼬가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다고 강권하여 같이 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발룬을 타기 위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발룬이 뜨는 장소로 갔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서도 발룬을 띄우기 위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니 오늘은 발룬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감독관청이 일기가 좋지 않다고 운행허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별로 바람도 불지 않는데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아마도 안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듯하였다. 할 수 없이 숙소로 돌아오니 숙소 주인이 말하기를 최근 한 열흘 동안 발룬이 한번도 떠지 않았다 한다. 어쩔수 없이 내일을 다시 기약하며 아침을 먹고 괴레메 탐방에 나섰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아들과 나는 무작정 걷는 것을 특기로 한다. 괴레메의 전 지역을 걷기로 하고 구경을 시작했다.

 

 

카파도키아의 바위 중 가장 유명한 바위

 

 

 

 

하얀 눈이 보이는 카파도키아의 평원

 

 

 

 

 

 

이름도 모르는 카파도키아의 풍경 - 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우리 상식을 벗어나 그 앞에 서면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풍경을 가진 곳이 여러 군데가 있다. 터키 중부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그런 곳이다.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앞에 섰을 때 자연의 경이로움에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고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예부터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기원전 18세기에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후, 수많은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되었던 이곳은 초기 기독교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기독교가 아직 공인되지 않았던 로마시대에 탄압을 피하여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초기 기독교의 성지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8~9세기 전반에 비잔틴 제국에서 일어난 우상파괴 운동으로 인해 암굴교회의 수많은 초기 벽화들이 파괴되어 지금 제대로 모습이 전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고 그 흔적만 보는 것이 안타깝다. 11세기 후반에는 터키 셀주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카파도키아도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분쟁이 아니라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모스크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건축물이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아 전한다.

 

 숙소를 출발하여 오늘은 자유롭게 구경을 하기로 하고 젤베야외박물관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 거리는 무난히 걸어서 갔다 올 수 있는 거리라 생각하고 발길 닫는대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차가 없고 버스를 이용하기가 어려워 좀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유적지는 내일 투어를 따라 가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걸으면서 구경하기로 한다.

 

 12월이지만 참 맑은 하늘은 우리를 상쾌하게 만들었고 또 제법 걸으면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하였다. 도로변이나 계곡근처를 보면 제법 눈도 쌓여 있는 풍경이 나타난다.

 

 

 

 

 

 

 

괴레메 시내 풍경

 

 

 

 

 

 

 

 

 

 

길을 걸으며 보는 여러 풍경

 

차츰 차츰 바위의 모습이 우리 눈을 자극한다. 기괴하게 보이는 바위들이 눈에 보이며, 겨울이라 눈이 쌓여 있으며 맑게 푸른 하늘이 우리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리 저리 눈을 돌리며 주변을 구경하며 처음 도착한 곳이  차우쉰이라는 옛날의 마을과 세례자 요한 교회다. 지금의 마을 위에 있는 옛날 사람들의 거주지는 암벽에 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카파도키아지역에는 큰 돌기둥이나 큰 암벽의 중간중간에 굴을 파고 사람들이 살아왔다. 왜 그들은 넓은평지를 두고 암벽을 파고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암벽 동굴집의 여러 모습

 

 

 

 

 

 

 

 

 

 

 

 마을을 조금 지나 교회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제법 언덕을 올라가면 세례자 요한 교회가 나온다. 교회라고 설명을 하였기에 교회인가 하고 구경을 하지만 별다른 특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을 구경하고 마을을 벗어나서 점심을 먹으려니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가게가 있어 음료수를 사니 식당을 겸하고 있다, 그래서 요기를 할 수 있는가 물으니 간단한 음식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주문을 하고 잠간 기다려 식사를 하고 다시 카파도키아의 풍경을 보기 위해 제법 높은 언덕에 올라간다. 무엇인가 이름이 있었다고 생각이 나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은 곳이다. 이 언덕에서 보는 카파도키아의 풍경은 우리를 매료시켰다. 각양 각색의 암석의 모습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우리가 착륙해 있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주변의 경치를 찍은 동영상

 

 

 

 

 

 

 

 

 

 그 어떤 거대한 손을 가진 거인이나 신이 있어 어느 한가로운 오후, 심심풀이로 진흙을 이겨 빚어 놓았을까? 어떻게 이런 자연 풍경이 만들어졌을까? 학자들은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약 900만년전부터 300만년전까지 계속된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온 땅을 뒤덮었고,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루어 신비한 자연이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뒤에 사람들은 이 기암괴석에 굴을 파고 거주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풍경을 보고 한 가지 오해를 한다. 우리가 재미있게 본 영화 가운데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있다. 사람들은 그 스타워즈의 동굴 집이나 배경이 되는 지구가 아닌 듯한 계곡들을 이 카파도키아에서 찍은 것으로 오해한다. 너무나 이 카파도키아가 우리 지구의 모습이 아니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카파도키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스타워즈는 튀니지의 마트마타사막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 곳에서 카파도키아의 경치를 조망하고 다음으로 간 곳이 차우쉰동굴교회다. 여러 곳의 기념품 가게가 있고 그 뒤의 거대한 암석 절벽에는 교회가 있다. 차우쉰동굴교회이다. 이 교회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따로 내어야 한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지 한가로이 앉아 있는 관리인에게 표를 끊으니 동양인이 이곳을 찾는 것이 신기한 듯이 본다. 입장료를 내고 철계단을 올라가 동굴로 들어가니 초기 교회의 성화가 벽에 많이 보인다. 오랜 세월에 많이 퇴색된 것 같고 또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초기 기독교의 성화로 가치가 있다.

 

 

 

마을과 교회 앞에 차우쉰이라는 표지

 

 

 

 

차우쉰동굴교회의 전경

 

 

 

 

 

 

차우쉰동굴교회 내부의 초기 기독교 성화들

 

 

교회에서 보는 전방의 풍경

 

 

 

멀리서 보는 차우쉰동굴교회 전경

 

차우쉰동굴교회를 구경하고 파사바아로 가는 도중에 파사바아와 유사한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카파도키아는 사실 어느 곳을 꼭 정하고 구경을 하지 않아도 곳곳에 버슷 모양의 바위들이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곳이 너무 많다. 그리고 모두가 우리를 경탄하게 한다.

 

 

 

 

 

 

 

 

카파도키아 곳곳의 모습

 

 길을 걸어 가면서 곳곳에서 기괴한 모습을 가진 바위들을 보면서 감탄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걸으면서 여행을 하는 즐거움이다. 차를 타고 가거나 투어를 따라 가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가 쉽다. 정해진 곳을 정해진 길로만 가기에 여행사나 가이드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관광객이 본다. 하지만 나와 아들은 우리 발길이 닫는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이정표를 보고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 차린다. 물론 현대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가 큰 공헌을 했다. 구글 지도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구경을 하면서 길을 가니 카파도키아의 바위군중 가장 유명한 파샤바아에 도착한다.

 

 파샤바아(Paşabaĝa) 언덕에서 굽어보면 버섯모양의 바위들이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송이버섯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둘 혹은 셋까지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이런 바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만화영화 스머프가 떠오른다. 만화에서 스머프들은 버섯모양으로 된 집에서 살고 있다. 이곳이 스머프가 사는 마을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버섯처럼 생긴 바위도 한 몫을 하지만, 버섯바위에 구멍을 뚫어 생활공간을 만들고 여기에 사람들이 거주를 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파샤바아는 터키어로는 장군의 포도밭이라 한다. 이곳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했다고 하여 그럼 의미가 붙여졌다. 화산 폭발로 퇴적된 지층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독특한 모양을 만들었는데 누가 보아도 송이버섯 모양이다.

 파샤바아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는 기둥위의 성자라고 던 시몬이 수도한 곳이다.

 

 

 

 

 

바위를 파서 거주했던 집의 모양

 

 

 

 

 

 

파샤바아의 가장 상징적임 바위

 

 

 

파샤바아의 여러 모습들

 

파샤바아를 구경하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젤베야외박물관으로 간다.

 

 젤베야외박물관은 괴레메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이다. 9~13세기 기독교도들이 은둔하면서 살았던 곳으로 교회와 수도원이 남아 있다. 이 계곡에는 15개의 교회의 흔적이 있는데 성화는 없고 여러 종교적 상징이 그려져 있다. 주거 지역에는 저장 시설도 따로 갖추고 있었으며 2층과 3층 등 각 층의 굴이 작은 땅굴로 연결되도록 유기적으로 설계됐다. 195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살았는데 동굴의 붕괴 위험이 높아지면서 터키정부가 1952년 지역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켰다. 이 젤베에서는 교회 외에도 계곡의 독특한 경치 자체가 볼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야외박물관은 아주 장소가 넓어 한바퀴를 도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마시라.  이정표가 이 야외박물관을 한 바퀴 빙 돌아 구경하도록 만들어 놓여있으니 그대로 따라만 가면 된다.

 

 

 

젤베야외박물관 표지

 

 

 

 

 

 

 

 

 

 

물고기와 포도 교회 설명

 

 

 

 

 

십자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밀 생산 도구

 

 

 

안내 이정표

 

 

와이너리 설명

 

 

 

 

 

 

 

 

 

 

 

 

 

 

모스크 설명판

 

 

 

 

 

벽에 그려진 물고기 모양

 

 

 

 

수도원 설명

 

 

 

수도원

 

 이 젤베야외박물관은 상단히 크다. 자세히 돌아 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린는지 모른다. 그냔 한바퀴를 돌아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다니니 이 정도라도 볼 수 있었다. 투어를 따라 가면 과연 얼마나 볼 수 있을지......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투어 여행객들을 보면, 내가 하루를 소비하여 구경하는 곳도 30분도 안되어 구경을 마치고 가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심지어 진짜 구경은 하지도 안하고 겉 모양만 얼핏 보고 가는 것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나는 투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젤베야외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서 카페에 앉아 괴레메로 돌아갈 생각으로 버스를 물어보니 조금 있으면 온다고 한다. 카페에 앉아 차를 한잔 마시고 아들과 오늘 구경한 여러 곳의 이야기를 하다가 버스가 와서 타고 괴레메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적어도 15Km는 넘는 거리를 걸었는 것 같다.

 

 숙소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고 나갔는데 우리집이라는 한식당이 있다. 그 옆에는 중국집이 있는데 아들과 오랜만에 한식당에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우리는 여행중에는 항상 현지 음식을 먹는 것을 불문율로 했지만 오랜만이라 아들도 동의한다. 식당에 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밥을 먹으면서 왁짝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낮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모두들 투어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식당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터키인 부부가 운영하는데 그런대로 한국 음식 맛을 내고는 있었다. 비빔밥, 불고기 김치찌개 등 등 많은 종류의 한국 음식이지만 재료가 터키산이라 ......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제법 피곤하다. 아마 오늘 제법 많은 거리르 걸은 듯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발룬을 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 잠자리에 들었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고대 유럽의 가장 오래된 도시 크노소스 

 

 크레타문명은 고대 그리스문명의 모태가 된 듯하다. 고대의 가장 강력한 국가는 이집트였다. 그리고 문화도 가장 발달되어 있었다. 그 이집트문명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지중해에 처음 도달한 곳이 아마 크레타일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펠레폰네소스반도로 상륙하여 미케네문명을 만들고 다시 이 미케네에서 아테네로 문명이 이동했으리라는 것이 대개의 의견인 듯하다.

 

 이 유럽문명의 기초가 되는 크레타문명의 중심은 바로 미노아문명이다. 그리고 신화의 궁전 크노소스는 미노아문명의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라비린토스(미궁),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로스의 신화 등이 모두 여기가 배경이다.

 

 이 궁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왕이 아내가 낳은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은 궁전이라 한다. 섬의 북쪽 해안 현재의 이라클리온시 남쪽 약 6km 지점 구릉 위에 있다. 크노소스에 있던 고대 왕국의 궁전으로, 궁전은 동서 170미터, 남북 180미터 규모로 장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60m×29m 정도의 직사각형의 중앙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과 그 가족을 위한 거주구와 공방, 서쪽으로 제례와 정치를 위한 공실, 창고 등 약 1200내지 1400개의 작은 방이 미로와 같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심한 붕괴로 상부구조는 분명치 않으나 2층 또는 3층 부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일종의 수세식 변소, 도관()을 이용한 하수도 등도 발굴되었다.

 

 크노소스의 한 가지 특징은 다른 고대 도시들이 대개 신전 중심의 도시라면 크노소스는 왕궁 중심의 도시라서 신에 관한 장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부의 벽이나 천장의 대부분은 궁정풍속, 동식물, 새, 물고기 등을 그린 회화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의 프레스코는 다 복제품이다. 진품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 있다.

 

 크노소스는 고대의 왕궁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 궁전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 복잡한 설계로 옛날부터 ‘라비린토스(미궁)’로서 유명하였다.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이 미궁 깊숙이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고, 왕녀 아리아드네와 함께 섬을 탈출하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크레타 문명은 트로이와 같이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트로이의 슐리만과 비슷하게 미노스 왕의 전설을 믿고 크레타 문명을 찾아나선 사람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uthur Evans. 1851~1941)였다.

 

 그는 크레타 문명의 존재를 믿고 입증하기 위해 크노소스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파라 언덕을 사들여 1900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크레타문명이 3,000년 동안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에번스는 그 자신의 예상대로 크레타 문명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유적은 에번스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나 그가 콘크리트 같은 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래 그대로의 설계와 건물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데에 어려움을 남겼다고 현대에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에반스의 공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 뒤 크레타 섬 이곳저곳에서 크레타 유적이 속속 발견되었다.

 

 에번스는 그의 전 생애를 크레타 문명 연구에 바쳤는데그의 공헌으로 크레타 문명에 대한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이 에반스의 공을 기려 크노소스궁전 입구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크노소스의 많은 출토품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 수장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의 크노소스는 옛날의 궁전의 자취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복원하였다고 하지만 허물어져 있는 건물의 일부와 돌덩이들, 그리고 조금은 복원이 조잡해 보이는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볼 수 있지만 여기는 크노소스다.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크노소스궁전

 

 

 

에반스의 업적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

 

 

크노소스 입구

 

 크노소스를 찾아가는 날에 비가 제법 내렸다. 비를 맞으며 크노소스궁전에 가니 입장객은 나와 아들뿐이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니 어떤 노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보니 우리나라의 문화해설사와 같은 사람들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해설료가 제법 된다. 거절을 하고 들어가니 이런 사람들이 제법 있으면서 가격을 흥정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나름대로 보고 갈 예정이기 때문에 다시 거절하고 발걸음을 궁전쪽으로 향했다.

 

 

 

 

크노소스궁전 터와 주요 관람 안내도

 

이 궁전 안내도가 아주 상세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내도를 참고해서 그냥 구경하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이 비슷한 모습들이다.

 

 

크노소스의 상징처럼 알려진 검은 황소의 모양. - 궁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South House 설명과 건물

 

 

 이 유적을 구경하는데 공작새가 처량하게 비를 맞고 앉아 있다. 조금은 생퉁맞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고대 유적을 지키고 있는 듯해서 반가웠다. 조금 뒤에 다시 보았는데 이 크노소스에는 제법 많은 공작이 있었다.

 

 

 

크노소스의 상징인 황소뿔 모형이 있는 주된 궁전의 모습

 

 

 

 

 

남쪽 프로필라이움(propylaeum)에 그려져 있는 항아리를 든 사람의 벽화

 

 프로필라이움(propylaeum)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나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운 문으로 이 벽화로 유럽인의 특징을 가진 크레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기름항아리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머리 부분은 공작의 모습이고 몸통은 사자의 형상의 프레스코

 

 

왕좌의 방에 대한 설명판

 

 

 

 

 크노소스는 정말 복잡하다. 건물이 정학하게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르겠고 지상의 건물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세우스의 신화 중 미궁에 대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자원한 테세우스는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맨손으로도 충분히 괴물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탈출 방법이 문제였다. 일단 라비린토스(미궁)에 들어간 사람은 설령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고 해도 얽히고 설킨 미로를 헤매다가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것이다.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실뭉치를 주면서 실끝을 입구에 묶은 다음 미궁으로 들어가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한다. 아리아드네의 말을 따른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탈출했다. 약 1400개의 방이 있다니 오죽하였겠나 생각이 된다.

 

 

 

 이 궁정의 동쪽 면의 중간에 거대한 계단(Grand Staircase)이 있는데 이것을 따라 내려가면 동쪽 날개(East Wing)에 이른다. 이 동쪽날개에는 왕과 여왕을 위한 분리된 왕가의 방들이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욕실, 화장실, 왕좌의 방들이 있는 거대한 방들이 있다.

 

 

  

 

동쪽 건물

 

 

 

 

기름 항아리

 

 

 

 

궁전의 벽

 

 

 

크노소스 기념품가게 앞에 핀 꽃

 

 

 

 

 

 

 

 

 

 

크노소스궁전의 여러 모습들

 

비를 맞으며 크노소스를 이리 저리 다니면 구경을 하였다. 해가 밝게 비추는 크노소스도 좋을 것이나 폐허가 되어 있는 크노소스에 비가 내리니 과거의 번창하던 모습이 다 사라지고 황폐한 유적만 남아 있는 모습에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 크노소스에는 모든 유물들은 복제품이고 건물들의 모습은 에반스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크노소스의 진짜 유물과 프레스코벽화 등은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제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으나 크레타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이렇게 번창했던 크레타는 왜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에번스는 대규모 천재지변으로 멸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B.C. 17세기에 일어난 산트리니 섬의 대폭발을 천재지변의 증거로 말하지만, 이 주장 역시 확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현재도 크노소스를 비롯한 크레타 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니 크레타 문명이 사라진 원인은 이런 조사들이 모두 끝나게 되면 밝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노소스 주변에는 기념품가게와 레스토랑이 많았으나 비수기라 대대부분이 문을 열지 않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버스를 타고 이라클리온으로 돌아 왔다. 크노소스를 마지막으로 나의 그리스 문명 산책여행은 끝났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까지 가볍게 휴식을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 때가 되니 아들이 숙소 가까운 곳에 보아둔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자그마하지만 조용한 레스토랑에 가니 일본인으로 보이는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온 것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것을 보아 여행에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부모가 데리고 다니면서 책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교육을 하는 것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는 저와 같은 젊은시절에는 왜 그리도 바쁘게 살았는지를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많은 곳을 여행하기는 했지만.....  한국사회가 이제야 좀 여유가 있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은 여유가 없는 시절이었다. 이제라도 나는 아들과 함게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니 그것만이라도 만족할 일이다.

 

 식당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식당의 벽에는 축구포스터와 유니폼이 걸려 있고, 또 각종 장식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레스토랑 전경

 

 

 

식당 벽에 걸려 있는 여러 장식들과 술병의 진열

 

 

 

 

 

맥주와 저녁식사

 

 아들이 어느 지방을 가던지 그 지방의 맥주가 있으면 꼭 한병을 시켜 함께 맛을 보고 맥주맛을 이야기 한다. 유럽의 각 지방 맥주는 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조금 쓴 맛이 강한 것도 있고 보리 맛이 약간 강한 것도 있고 조금씩은 미묘하게 다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각 지방에서 그 지방의 맥주를 마셔 보는 것도 한 재미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니 후식 겸 서비스로 꿀에 절인 과일과 나프폴리오의 식당에서 주던 그리스 술 라키를 한 병 준다. 그래서 이 술도 마시고 쉬다고 숙소로 돌아 왔다. 이제 그리스여행은 이것으로 끝났다.

 

내일이면 터키로 간다.

 

 

- 그리스 여행을 마치며

 

 나의 그리스 문명산책은 아무런 지식이 없이 시작되었다. 남들이 다 가지고 가는 여행안내서도 없이, 아들이 가자는 곳을 그저 따라만 다닌 것이다. 물론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단순하게 책을 조금 읽고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익힌 것이 대부분이지 실제로 그리스 문명이 어떠한지는 전혀 모르고 무작정 다닌 것이다.

 

 돌아와서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리스에 대해 조사도 하였고, 그리스 문명에 대해서도 책을 좀 읽어 보았다. 그러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전에 사전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사전 지식이 없이 내 눈에 보이는대로 보아야 하는지를......

 나는 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굳혔다. 사전 지식이 없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고. 왜냐하면 사전에 책을 통해 지식을 가져가면 문명이나 문화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되고, 보는 것도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에 사로 잡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자유롭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다. 물론 아들녀석이 다 계획을 세워서 애비를 데리고 다녔지만......

그래도 다녀와서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여러 편 보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점이 나를 행복감에 젖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내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다.

젊은 아들이 나이든 아버지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둘이서 배낭을 메고 한달 이상이나.

 

 하여튼 우리는 그리스여행을 마치고 내일은 터키로 가서 당분간 터키를 여행할 것이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크레타 이라클리온 주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코린토스를 떠나 크레타로 간다.

 

 크레타에는 공항이 있어 비행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행을 하기 때문에 배를 타기로 해서 아들이 미리 배편을 예약해 놓았다. 기특하게 아들은 이런 면에서 나를 감탄하게 한다. 그러면서 크레타를 떠날 때는 비행기를 타자고 한다. 나는 아들 의견대로 따를 뿐이다.

 

 코린토스에서 기차를 타고 아테네로 갔다. 코린토스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아주 쾌적하게 갖추어진 역에서 정시에 출발하여 우리를 아테네역에 내려 준다. 아테네에서 코린토스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한 듯하다. 아테네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피레우스항구로 가니 항구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특히 여객선이 많아 자기가 가는 섬의 여객선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항구를 계속 걸어가니 곳곳에 배표를 파는 창구가 있다. 우리가 가진 표를 보여주니 타는 곳을 가르쳐 준다. 뒤애 알았지만 이곳을 운행하는 셔틀 버스가 있었다.

 

 크레타로 가는 배를 찾아 탑승을 하고 내부를 구경하니 여객선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크기가 장난이 아니게 크다. 배는 8층인가로 되어 있는데 크루즈와 같이 배안에는 온갖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다. 객실 탑승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잔다. 그래서 좋은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서 경쟁이다. 우리는 객실을 신청했기에 그런 걱정없이 한가롭게 객실에 가니 웬만한 호텔과 같다. 크레타의 이라클리온항구까지는 약 10시간 걸리기 때문에 밤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한다. 우리 부산에서 배로 제주도 가는 여정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단 여객선을 우리가 쨉이 안된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도 이런 여객선을 가질 수 없는지.....

 

 아마 지중해라는 큰 바다를 가지고 많은 섬들이 관광자원으로 있기 때문에 이런 큰 여객선이 운행되리라 생각한다. 배에는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크레타로 가는 여객선의 외부와 내부

 

 항구를 찾아 배를 타느라 저녁도 먹지 않아서 배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가니 처음에는 손님이 없이 한가했는데 조금 있으니 제법 많은 손님들이 들어 온다. 식사 도중에는 바이올린 협주를 해 주고 있는 제법 고급스런 곳이다. 나오면서 밖을 보니 일종의 대중음식점 같이 보이는 저가의 식당도 보였다. 저녁을 먹고 배위에서 항구의 야경을 조금 구경하고 있으니 배가 출항을 한다.

 바깥에서 잠시 거닐다가 선실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조금 소란스런운 느낌이 들어 잠을 깼다. 보니 벌써 도착할 때가 다 되어간다. 아마 조금 피곤했는지 나는 잠이 깊이 들어 잘잤는데 아들은 잠을 잘 못잤다고 한다. 배가 조금 출렁거렸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들은 민감하게 느꼈다고 한다.

 하선을 준비하고 배를 내리니 비가 오고 있다.

 

 드디어 크레타의 대표적인 항구 이라클리온(혹은 헤라클리온)에 도착했다.

 

 크레타(Κρήτη, Crete)는 에게해 남단에 있는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섬으로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고향이자 유럽 문명의 발상지다. 면적 약 8300km²로 에게 문명의 중심지로서 청동기시대에 번영하였다. 오늘날도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문화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지만 고대사에서 크레타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이 산 것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 크노소스는 신석기(나중에는 미노아 문명) 유적지의 한 곳이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이었다. 초기 크레타의 역사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같은 전설이 서려 있으며,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크레타는 미노아 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유적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 기후 지역에 속하여서 무척 온화하다. 공기는 상당히 습하고,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겨울에도 꽤 따뜻하다.

 

 크레타는 고대부터 지중해의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많은 전쟁을 겪어왔으며, 2차세계대전까지 전화에 휩쓸렸다. 현재 크레타 섬은 그리스에서 휴가지로 인기가 높다.

 현재의 수도는 북안의 이라클리온 (Iraklion, Herakleion, 옛이름은 칸디아 Candia)으로 이 시에는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이 있어서 크레타 유적의 진수를 보여 준다.

 

 항구에서 호텔을 찾아가는데 곳곳에 유적이 눈길을 끈다.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호텔을 찾아가 아침을 먹고 이라클리온 관광에 나선다.

 

 

 

 

비내리는 항구의 모습

 

 

 

 

베네치안 로지아

 

먼저 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베네치안 로지아가 있다. 크레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네치아 양식의 건축물로 1626년에서 1628년에 걸쳐 베네치아 총독 프란시스코 모로시니가 지었다. 옛날에는 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특이하게 유적을 밑받침으로 하여 현대식 건물이 위에 들어서 있다.

 

 

이라클리온 시내 안내도

 

항구에서 바로 옆을 보면 성같은 곳이 해안에 보인다. 표시판을 보니 베네치아 성인 쿨레스요새다. 바다를 접하면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2층으로 쌓은 성이다. 규모는 상당히 크고 외부에서 보는 성의 조형미가 아름답다. 성을 올라가 바라보는 바다는 망망대해였다. 내가 간 날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성벽을 때리는 파도가 힘차게 부딪혔다. 바로 바다를 접하고 지은 요새로 천연의 위치에 인공을 더하여 항구를 보호하고 있었다.

쿨레스요새부터 부두까지는 이라클리온의 놓치지 말아야 할 산책길이다.

 

 

 

요새 전경

 

 

요새성벽

 

 

 

 

요새 내부에 있는 조그마한 박물관의 소장품

 

 

 

 

 

 

 

 

 

 

 

쿨레스요새 2층의 모습

 

 

 

쿨레스 요새에서 보는 바다

 

 

 

 

 

 

성 티토스 교회

 

  이 교회는 이라클리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성경에는 티토로 적혀 있는 티토스는 기적의 성인으로 크레타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st. Paul)이 선교 여행을 하면서 생활수준이 낮았던 크레타 섬을 드르게 되어 기독교의 교회를 건설하고 또 조직하고 티토스를 크레타에 남겨 크레타섬을 기독교 사회로 만들도록 하였다. 신약성경 속 티토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티토에게 보낸 서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찬 1:5) 라고 씌여져 있다. 바울은 크레타인들을 거짓말쟁이, 고약한 짐승, 게으른 먹보라고 하면서 티토에게 그들을 가르치라고 했다. 그가 잘못을 바로잡아서 일까? 티토스의 성인 찬양송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하느님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한 행적으로, 사라질 육신보다 영원한 영성에 대해 가르쳤도다. 거룩한 티토스여,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나이다.' 이다. 그래서 기적성인인가보다

 

 8월 25일 거리에 있는 교회로 주변에는 카페와 바 및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둘러 싸고 있다.  

 

 

 

 

이라클리온 시청사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건물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무슨 박물관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시청사였다. 옛날의 건물을 그대로 현재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내부는 개조하였지만......

 이 건물은 1628년 Francesco Morosini에 의해 건립되었고, 베네치안 건물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여진다. 지었을 당시에는 일종의 클럽의 기능으로 상류층 귀족들이 모여 토론과 담소를 즐기던 장소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62년에 복원된것으로 원형을 아주 잘 살렸다고 한다.

 

 

이라클리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8월 25일 거리

 

 이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이 아름다운 거리의 이름은 특이하게 8월 25일 거리다. 무엇인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붙인 것이리라.

 

 크레타가 터키의 지배하에 있을 때 1889년에 터키 관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터키 당국은 살해사건을 빌미로 크레타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인에게 학살당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자 명명한 것이 825일 거리다. 그리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붙여졌다.

 

 

 

베니젤로스광장의 사자분수

 

이라클리온의 랜드마크인 이 광장의 정식명칭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광장이다. 사자분수는 베네치아인들이 남긴 유물로 도시 전체의 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아래의 안내판을 보면 1629년에 지금의 시청사를 건립한 모노시니가 만들었다 한다.

 

 

모로시니 분수 (사자분수임)

 

 

 

성마르크스교회

 

성당으로 묘지로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

 

 

 

비오는 이라클리온 시내 풍경

 

 

시 소속의 악대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아침을 좀 부실하게 먹어 시장기가 들었다. 점심을 먹자하니 아들이 자기가 찾아본 곳이 있다고 가자 한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은 여행에서 먹는 것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항상 그 지역의 전통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제법 이름있는 레스토랑을 조사해서 나를 데리고 간다. 나는 아들을 따라 가서 맛있게 먹고 계산만 하면 된다. 나이가 든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는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최소한의 행동이다. 식당을 가니 아직 시간이 안되었다고 자리에 앉아만 있으라고 하면서 주문을 받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아주 철저하게 시간을 지킨다. 문을 여는 시간이 되자 메뉴판을 가지고 와서 주문을 받는다.

 

 

 

 

 

레스토랑 입구와 내부 - 아주 깨끗하고 아담하다.

 

 

 

 

 

식당의 용기에도 그들의 상호가 새겨져 있다.

 

 

 

음식은 대체로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점심을 맛있게고 잠시 휴식을 한 후에 드디어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으로 향한다. 우리가 여행하는 각 지역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곳이 바로 그 지역의 박물관이다. 각 지역의 박물관에는 그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

 

크레타에서 가장 큰 고고학박물관으로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크노소스와 크레타 각 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볼 수있다.  

 

 우리가 크레타를 가면 먼저 크노소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크노소스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 많은 유물이 어디에 있는가? 크노소스에서 부족했던 2%를 채워줄 곳이 바로 이라클리온고고학박물관이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들의 원본도 만날 수 있을뿐만 아니라 파이스토스 원반을 비롯한 뱀여신상, 황금뿔을 가진 황소 머리상 등 등  눈 여겨 보아야할 유물이 많이 있다. 다양한 그릇과 잔, 무기, 금으로 된 각종 장신구, 화려한 색깔의 벽화 등을 보는 것만으로 크레타 섬이 왜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지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뿔 모양의 술잔, 물고기와 문어 등이 그려진 도자기 등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크레타 문명의 진수를 보여준다.

 

 

박물관 전경과 현판

 

 

파이스토스 원반 - 아직 해석이 불가능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은 크레타의 파이스토스에 있는 미노아문명의 궁전에서 발굴된 구운 점토원반으로, 그 제작 연대는 BC 제2천년기 청동기시대로 추측한다. 크기는 직경 약 15 cm인데 그 원반의 양면이 모두 나선형으로 찍힌 기호들로 뒤덮여 있다. 이 기호들의 목적과 의미, 심지어 무엇을 위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위치조차 불확실하여, 현존하는고고학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황금 뿔을 가진 검은 황소 머리상

 

 

 

금 장신구

 

 

특별히 'The Ring of Minos'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금 장신구

 

 

 

 

 

각종 도기들

 

 

크노소스궁전 모형도

 

 

무엇인지 기억이.....

 

 

뱀여신상

 

 

 

무기들

 

 

 

프레스코

 

이 박물관에서 미노아 문명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유물들을 구경하고 또 이라클리온 시내를 정처없이 거닐며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을 찾아 간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성벽이 있다. 바로 베네치아인이 크레타를 지배한 뒤에 남긴 여러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인 베네치아성벽이다. 지금도 그 성벽 아래로 차들이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성벽이다. 이 섬에 이렇게 큰 성벽을 건립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이 섬이 중요한 곳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베네치아 성벽

 

 

 

 

무덤 표지판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이 성벽을 돌아 올라가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희랍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이 나온다. 그는 그리스의 시인이며 소설가며 극작가로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는데, 그리스 난민의 고통을 묘사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대표작으로 '희랍인 조르바' '오디세이아'등이 있다.

그의 묘는 명성에 비해서는 소박하다. 평범한 돌과 나무 십자가 아래에 묘가 있다. 그의 소박한 묘비에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적혀 있다. 장편 소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긴 이 명언이야말로, 크레타의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유럽 최초의 고등 문명인 미노아 문명이 탄생한 곳이자, 제우스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섬. 자유를 외친 카잔자키스와 독창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이은 천재화가 엘 그레코의 고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크레타 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제대로 숨 쉬고 싶다면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자유를 말한 크레타에서 살아봄직하다

 

 

 아내 엘리니 카잔자키스의  무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에서 보는 시내 풍경

 

 아들과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희랍인 조르바를 비롯해서 여러 문학 작품을 이야기하며 카잔자키스에 대해서도 아는대로 이야기 한다. 이 크레타가 카잔자키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의문도 가지면서......

 

 휴식을 잠시한 후 다시 묘를 내려와 찾아간 곳은 성 미나스성당이다. 성 미나스 성당(Cathedral of Saint Minas)은 크레타는 물론 그리스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그리스 정교회 교회로 1862년에 건립하기 시작해서 무려 30년이 걸려서 189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미나스 대성당은 장엄하게 보이는 외부 뿐 아니라 내부는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찬란한 샹들리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돔 천장은 크레타의 오랜 전통을 가진 이콘(icon)이라 불리는 성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라클리온의 수호성자인 성 미나스를 기리는 교회로 아름다운 돔 양식의 십자가상 구조가 특징이다. 약 8천명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성 미나스 성당의 외부

 

 

성당입구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이라클리온 해변 산책로

 

 

 미나스성당을 뒤로 하고 해변으로 내려 오니 해변 산책로이다.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파도가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조용해졌다. 이 산책로를 걸으면서 아들과 여러 이야기를 한다. 아들은 온갖 방면에 관심이 많다. 물론 젊기 때문이겠지만 다양한 방변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라고 이것 저것을 물으면서 아버지의 생각을 묻는데 내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버무려 버리는 경우에도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내색을 하지 않고 항상 이야기를 걸어 온다. 이 점이 무엇보다 고맙다. 나이 차이가 많다고 내 의견을 무시하거나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라클리온 시내는 좁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다녀도 하루만 하면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있다.

 

 호텔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밤의 이라클리온을 구경하러 나간다. 

 

 

 

불을 밝힌 시청사

 

 

 

저녁은 오랜만에 피자와 햄버그로 했다.

 

 

식당 주변의 모습

 

오늘 하루도 이라클리온 시내를 정처없이 걸으면서 구경을 했다.

 

 내 여행의 방법은 걷는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제대로 무엇인가를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걸으면 우리 눈에는 많은 것이 보인다. 특히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 하루도 끝내며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고대 고린토스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영원한 형벌 시시포스의 신화가 전하는 곳

 

고대코린토스는 신 코린토스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코린토스는 기원전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기원전 8세기에는 25만 정도의 인구가 머문 거대 상업 도시로 발전했으며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양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 코린트 전서에서 보듯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도시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택시를 불러 타고 고대 유적지에 앞서 코린토스 옛성으로 갔다. 여담으로 이야기하면 그리스 택시비는 우리보다 싸다.

 

 먼저 아크로코린토스로 갔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인 아크로코린토스는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고도가 높은 이 지역에 요새를 지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았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웠다. 입구는 산의 서쪽에 있고 문은 3개가 있는데 각각 투르크식, 프랑크식,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성 안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성역에는 1000명이나 되는 히에로두로이[신역 직속의 창부(娼婦)]가 있었다고 한다.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아 비안개가 심하게 끼였다, 잠깐 안개가 걷히기도 했으나 너무 안개가 자욱하여 성위에서는 코린토스 일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한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옛 성길을 거닐면 과거의 영광을 생각도 해 보았으나그래도 관람을 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아들 녀석도 일기만 좋으면 경치가 환상적일 것이라고 한탄을 한다. 하지만 일기마저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쉽지만 그런대로 구경을 한다.

 

 

 

 

위용을 자랑하는 외부 성문 입구

 

 아크로코린토스의 외성은 겉 모양은 매우 아름답게 보이나 이 성은 피로 반죽하고 살로 구웠다고 하는 처절한 역사가 숨어 있다.

 

 

 

 

입구를 통과하여 성을 올라가는 길 - 안개가 너무 끼여...... 

 

 

 

 

비안개가 자욱한 아크로코린토스성벽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주였던 평소 성정이 차갑고 잔인했던 레온 스구로스는 프랑크족이 침입하자 항복하지 않고 자신의 애마와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한다.

 

 

남서쪽 타워 설명도

 

 

 

자욱한 안개속에 보이는 성벽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아크로코린토스성문

 

 

코린토스 옛성과 고고학 유적지 표지

 

아크로코린토스의 입구 -  레온 스구로스가 뛰어내리자 비로소 이 성문이 열렸다고 한다. 지금의 이 문은 베네치아시대에 재건한 것이다.

 

 

아크로코린토스 설명도

 

 

 

안개속으로  얼핏 얼핏 보이는 성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가 있는 곳은 원래 아포르디테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러 가지의 측면이 있겠지만 아포르디테는 문제가 많은 여신이었다. 현대에서는 사랑의 여신, 미의 여신이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저속한 세속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이 곳은 여사제이자 창녀, 또는 신도이자 창부인 히에로두로이(신역 직속의 창녀) 1000여명이 머물렀던 타락의 도시로 유명했던 코린토스의 일면이다.

 

 코란토 전,후서를 쓴 사도 바울의 눈에는 온갖 음행이 자행되는 도시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치한다.

 

"이 도시가 사람으로 붐비고 부유해진 것은 그 여인들 덕분이었다."

 (스트라보, 코린토스의 성스러운 매춘부들에 대하여)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이 춤과 노래로 사내들을 유혹하여 웃음을 팔던 곳.

지금은 폐허뿐이다.

 

 

 

 

안개속으로 보는 성벽

 

 

성 내부 설명도

 

 

무슨 창고였던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세번째 방어벽

 

 

 

 

두번째 방어벽

 

안개가 너무 끼여서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워 아크로코린토스는 아쉽지만 내려 가기로한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구경을 하면서 성위로 계속 올라가면서 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고 아들이 답하니 그들은 올라가 보겠다고 간다. 젊음이 좋은 것이다.

 

 아쉽지만 아크로코린토스를 뒤로 하고 고대코린토스 유적지로 내려 갔다.

 

 

고대코린토스 유적지

 

 코린토스는 옛날부터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3대 도시국가로 꼽힐만큼 번창했던 도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유적만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이 유리우스 카이사 시절인 BC 44년에 재건한 도시의 흔적이다. 오랜 명성에 비해 유적의 규모는 작지만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도 재미있다.

 

 유적 중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아폴론 신전이다. 돌을 잘라서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을 이용해 기둥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돌의 크기가 상상 이상이다.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석조물을 만들었는지 유적지를 돌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이다. 이 아폴론신전은 올림피아의 헤라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유적의 바깥쪽에는 오데온과 극장의 자취만 남아 옛 영화를 보여준다.

 

 코린토스의 고대유적지는 저지대의 구코린토스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아크로코린토스를 배경으로 코린토만을 마당으로 삼은 곳이다. 유적은 아폴론신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아폴론신전만이 웅장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를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거의 대부분의 유적지를 폐허 상태로 그냥 두고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너무 많은 유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유적을 보존할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유적을 관광자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유적을 좀 더 잘 보존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잘 보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복원한다고 하면서 옛날의 원형을 무시하고 현대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폐허 그대로가 우리 눈을 더 자극하며 상상을 더할지도 모름다.

 

 

고대코린토스 안내도

 

 

 

 

 

 

 

 

아폴론신전의 여러 모습

 

 코린토스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인 이 신전은 세울 때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 신전은 이 도시의 황금기였던 BC 6세기경에 처음 지어졌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38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7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글라우케샘

 

 글라우케는 코린토스 왕국의 왕 크레온의 딸로 크레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아손과 메데이아와 글라우케 사이에서 전설은 만들어졌다. 이 이야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메데이아가 자기를 버린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크레온 왕과 글라우케 공주 그리고 남편 이아손을 죽일 계획으로 글라우케에게 결혼 축하선물로 독이 묻은 웨딩드레스를 보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글라우케는 신랑의 전처인 메데이아가 보낸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 글라우케는 옷에 묻은 독이 몸에 퍼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는다. 결국 글라우케는 불길에 싸여 고통 속에서 샘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이를 불쌍히 여긴 신들이 푸른 샘으로 만들었다 한다. 또 코린토스 지역에 내려오는 다른 전설에 의하면, 글라우케는 연기를 견디다 못해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후로 그 우물은 글라우케 샘이라고 불린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화나 전설은 한 사람만 거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그저 그런 신화가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피레네샘

 

 피레네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잘못 날아온 원반에 그 아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죠. 자식을 잃은 피레네는 밤낮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눈물이 몸을 녹여 마르지 않는 샘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곳을 `피레네 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는 피레네샘이 아크로코린토스에 있다고도 하는데 같은 샘인지 다른 샘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두 샘은 슬픈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코린토스 유적 전경도

 

 

 

 

 

로마시대의 시장

 

 

 

 

코린토스 유적에서 보는 아크로코린토스

 

 저 높고 가파른 산이 시시포스의 신화가 서려 있는 산이다. 아직도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정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이 신화의 산을 보면서 우리 인생 자체가 모두 부조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잠긴다.

 

 간단히 이 신화를 말하면,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시시포스의 속임수와 약은 행실은 나중에 저승에서 커다란 벌로 돌아왔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받은 벌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내렸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는 수필집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와 같은 시시포스의 노역을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를 상징하는 상황으로 묘사하였다.

 

 

 

 

 

 

사도 바울이 전도했다는 유적 -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인다.

 

 산꼭대기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제관(무녀)의 여자들이 천 명 이상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산 밑의 사내들과 불륜을 밥먹듯이 저지르고 그것도 애비와 아들을 같이 끼고 노는 무녀도 있었다고 한다. 에페소에서 그런 소식을 접한 사도 바오로가 코린트 사람을 향해 쓴 편지가 코린트 전서다. 신약 성서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성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초기 기독교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서기 51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다. 그는 6년 후 도시를 다시 찾았고, 두 편의 서간을 썼다. 바로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 이는 신약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로 찾는 곳이 코린토스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8:11)  

 

 

코린토스고고학박물관

 

 코린토스유적 한쪽에는 코린토스박물관이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코린토스고고학박물관은 아담한 시골 도서관처럼 보이지만 규모와 내용면에서 상당한 수준이다. 건축가 스튜어트 톰슨(W. Stuart Thompson)이 1932년 완공한 것으로 전시실과 대형 뜰로 구성돼 있다. 외부 주랑과 뜰에는 대리석 조각상들이 줄지어 있고, 코린토스에서 발굴된 조각, 도자기,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두 개의 주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아들로 추정하는 <젊은이의 대리석 초상>, <디오니소스의 머리가 장식된 모자이크>, <비잔틴 꽃병> 등이 있다.

 

 

 

옥외 뜰의 조각상

 

 비바람에 훼손되는 것을 염려할만도 한데 그리스에는 이렇게 외부전시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아마 이 정도는 너무 많아서일까? 그런데 이 박물관의 대리석 조각은 대개 로마시대의 복제품이라 아쉽다. 그리고 왜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보는 조각상들은 거의 대부분이 머리가 잘려 있을까?

 

 

로마 지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조각상

 

 

아마 아포르디테라고 짐작된다.

 

 

 

 

여러 전시물

 

 

디오니소스를 위한 모자이크

 

 술의 신이며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를 위한 모자이크다. 원근법에 따른 입체적 느낌이 드는데 네 장의 꽃잎을 펼쳐놓은 듯 섬세하게 만들었다. 바닥에 깔렸던 것을 벽에 걸어 놓은 것이란다. 중앙의 인물도는 디오니소스의 얼굴이라 한다.

 

 

 

 

코린토스 도기들

 

 

여러 조상들

 

 

 

코린토스 유적이 있는 마을 풍경

 

 코린토스 유적을 구경하고 나오니 또 비가 오기 시작한다. 유적지 주변은 이 유적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상당히 큰 마을로 각종 기념품가게와 카페 레스토랑이 있다. 내가 간 때는 계절적으로 비수기라 번잡하지 않고 가게들도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었다.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리스의 고대 문명 유적지 마을은 대개 아름답다.  옛부터 도시가 만들어졌으니 그 자연의 아름다움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지만 지금도 마을의 꾸밈 자체가 예쁘다.

 

 비가 오는 가운데 길을 물어 버스를 타고 신코린토스로 돌아 왔다.

 

 이제 그리스 본토의 여행은 아쉽지만 여기서 끝을 내고 크레타로 가기로 하고 잠시 휴식을 한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 코린토운하와 시내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펠로폰네소스반도의 관문 코린토스

 

 고대유적지와 운하로 유명하며 시시포스의 신화가 어려 있는 코린토스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곳에 위치하며, 고대폴리스 및 현대도시로 구별되며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고, 시의 유적지에서 미케네시대 전기의 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코린토스는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의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지로 유명하며 신약성서에도 코린토서라고 그 이름이 나온다.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새 코린토스시는 유적지가 있는 고대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8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의 주도시이다.

 

 코린토스에 몇 일을 머물면서 주변의 여러 유적지를 탐방하고 저녁시간이나 여가의 시간을 이용하여 코린토스 시내를 돌아 보았다. 그 중에서 지금은 코린토운하와 신코린토스 시내를 보여 드리고자 한다.

 

 코린토스 운하는 고린토스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네로황제이전부터 수 많은 노예들을 동원하여 건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결국 1883년에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를 이용할 경우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아가는 것보다 700km 정도 운항거리가 줄어들지만,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지금의 코린토스 시외버스정류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1시간만 되어도 구경할 수 있다.

 

 

 

 

코린토운하 지형 설명도

 

 

 

코린토운하를 건설하는데 공헌한 사람들을 기록한 기념동판

 

 

 

 

 

코린토운하 다리

 

 이 코린토운하는 깍아지른 협곡의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항로를 개척한다고 해도 아득한 로마시대에 이 운하를 파려고 한 생각이 놀랍다. 하지만 현대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예전과 같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의 화물선이 통과하기에는 수로가 너무 좁다. 그래서 지금은 화물선의 통과보다는 관광객유치의 한 방법으로 코린토운하를 다니는 관광여객선이 있다고 하는데 타 보지를 못해 좀 아쉬웠다. 또 이 코린토운하 다리에서 번지점프도 한다고 하는데 보지를 못했다.

 

 

코린토시내

 

 코린토스시내에 몇일을 머무면서 저녁이 되면 시내를 배회하면서 카페와 레스토랑 등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새로 조성한 시내는 계획도시로 거리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코린토스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머물기 때문에 깨끗하고 제법 번화했다. 시내의 번화가에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연인들도 거리를 거닐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끼리끼리 담소를 하거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시내 번화가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해변이 나오며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몇 일동안 기상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아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좀 우울하게 보였지만 시기가 년말이 가까운 12월 말이라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으로 찬란하게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웠다.

 

 

 

 

코린토스 시내의 같은 장소의 밤과 낮의 풍경

 

 

 

 

 

 

 

 

 

비오는 오후 코린토스항구

 

 

 

 

 

 

 

 

 

 

밤이 되어 불을 밝히고 있는 거리와 그 거리 양쪽에 늘어서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들

 

 이 코린토스 시내는 참 다양한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 서 있다. 대부분의 가게가 가격도그렇게 비싸지는 않았지만 이곳도 현대화의 물결때문인지 그리스 전통적인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았으나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패스트 푸드점이었다. 이점이 좀 아쉽게 여겨졌다.

 

 우리나라에도 카페가 많지만 그리스에도 카페가 즐비하다. 그리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다. 이 점이 우리와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잘 가는 카페에 나이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곳은 그런 의식이 좀 없었다.

 

 물론 젊은이들만 가는 카페가 있겠지만......

 

 내가 가본 곳에는 함께 어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