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해파랑길 11코스(나아해변 - 감포항)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11코스는 나아해변에서 출발하여 봉길해변의 문무대왕 대왕암을 지나 감은사지를 돌아나와 해변길을 따라 감포항까지 가는 길이다. 그런데 나아해변에서 출발하면 월성전원국가산업단지(월성원전)이 해변에 자리잡고 있어 해변으로 가지 못하고 안쪽 길을 우회하게 만들어져 있다. 더구나 이 길을 걸어서는 가지 못하고 반드시 차를 이용하여 봉길터널을 지나게 하는 코스다. 이 터널을 지나 봉길에 내리면 바로 유명한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눈에 들어온다.

 

나아해변 풍경

 

나아리 버스 정류소

 

 나아리에서 봉길터널을 지나기 위해서 버스정류소에서 시간표를 보니 제법 많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지나가기로 생각하고 마을 주변을 보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 마트에 들어가 택시를 호출하려고 알아 보니 약 4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여,그시간이면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봉길터널을 건넜다. 조금 교통편이 좋지 않은 곳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월성원자력발전소(月城原子力發電所)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및 문무대왕면 봉길리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로, 동해안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수로형 원전으로 건설된 1호기는 197752일 건설에 착공하여 1982820일에 핵연료를 넣고 19821231일 시험발전을 시작하였다. 월성원자력발전소(月城原子力發電所)는 고리(古里)원자력발전소 1호기에 이어 두 번째 한국에 등장한 것으로, 캐나다에서 개발한 국내 유일한 가압관식 중수형 원자로(加壓管式重水型原子爐)를 설치했다.

 이 대규모 공사에서 설계감리(設計監理) ·기계조립 ·토목공사 등은 국내 기술 ·인력이 맡아 해냈고, 원자로는 주계약자인 캐나다 제작하고, 터빈 ·발전기 계통은 영국 ·캐나다 합작의 파슨스사(), 변전(變電) 설비 등은 영국의 GEC가 각각 제작, 공급하였는데, 값싼 천연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함으로써 발전 원가(原價)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설계 수명이 30년인 월성 원자력 1호기의 운영기한은 2012년이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20152월에 10년의 수명연장을 결정하면서 운영 종료 시점은 2022년으로 늘어났다가 20186월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에서 조기 폐쇄가 결정되었다.

 

 봉길터널을 지나 버스를 내리면 바로 문무대왕릉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하지만 문무대왕릉은 해안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그냥 멀리서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예전에 이 릉을 몇번이나 구경을 하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행정구역이 문무대왕면으로 바뀌었지만, 울산의 대왕암은 공원으로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관광객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이곳은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물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런 아쉬운 자연환경도 개발을 위한 조건으로 바꿀 수 있는데..... 하나의 예로는 문무대왕릉 주위를 도는 보트 투어 같은 것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멀리 보이는 문무대왕릉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편에 의하면 ‘71일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문무라 시호하였는데 그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상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고 하였다.’(김종권역)고 전한다.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 대왕암은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 네 방향으로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2001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 아래를 조사한 결과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이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

 

 여기서 감은사지로 발길을 돌려 걸으면 제법 큰 하천이 나오는데 이름이 대종천이다. 그리고 그 하천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대종교이다. 왜구가 침입하여 큰 종을 약탈해 가다가 이 하천에 종을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대종교에서 보는 동해 바다

 

감은사지 가는 길

 

 경주 감은사지(慶州 感恩寺址)는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감은사 절터로 사적 제31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은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이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 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시기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큰 탑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멀리서부터 잘 보이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금당 앞으로 동과 서에 하나씩 놓여 있다.

 두 개의 탑보다 이야기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금당 자리의 석축이다. 금당 아래 석축 사이로 제법 큰 공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해 바다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 능도 가까이 있어 그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곳곳에 놓인 석재에는 보통 절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양인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감은사지를 구경하고 쉬다가 발길을 재촉하여 해안으로 돌리니 조금은 이상한 공덕비들이 쭉 나열되어 서 있다. 내용을 보니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거두들의 추모비이다. 나도 한 때는 역사학도를 꿈꾸었기에 추모비의 이름을 보니 모두 아는 인물들이라 잠시 참배를 했다.

 

참배단

 

 이곳에서 감포를 향해 바다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시원한 바다바람을 즐기며 경치를 완상하면 된다.

 

 

해룡일출 대관음사 - 아마 바다에 가장 가까운 관음상인 듯

 

 여기서 해변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서 동해의 바다를 즐기다 보면 약간 곤혹스럽다. 표지는 계속 가라고 되어 있는데 길은 통행금지 구역이라고 되어 있다. 적당히 건너서 나오면 되지만 이런 사소한 점도 좀 개선하였으면 한다.

 

해변에서 도로로 나오는 곳 - 통행금지가 되어 있다.

 

만파식적 피리 모형탑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나정 해안

 

용굴 1, 2의 다양한 모습

 나정해안에서 바닷길을 따라 걸으면 해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의 오묘한 동굴이 나온다. 이름하여 용굴이라고 붙여 놓았는데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아마 지나는 사람들이 붙인 명칭인지 길가의 계단 난간에 매직으로 용굴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파도와 바람에 의해 깍이었는지 이쪽과 저쪽이 뻥 뚫여 있는 제법 큰 구멍이다.

 

감포로 가는 바다 길

 

 동해의 시원한 바람을 맡으며 길을 계속 가니 감포항에 도착한다. 수 많이 와 본 곳이지만 오늘은 감회가 새롭다. 예전에 감포로 올 때는 경주에서 차를 타고 왔는데 오늘은 저 아래쪽에서 길을 다라 걸으면서 감포에 도착하였다. 모든 것이 새롭게 여겨지는 오늘이다. 오늘의 여정은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