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남파랑길 49 코스(진월초등학교 - 백운그린랜드 - 중동근린공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남파랑길 49 코스는 진월초등학교 옆에서 시작하여 망덕포구를 거쳐 포스코광양제철소를 한 바퀴 돌아 나가 중동근린공원까지 가는 15.1km의 길이다. 그런데 48 코스의 끝임과 동시에 49 코스의 시작점이 두루누비의 지도와 코리아둘레길의 지도가 조금 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이 그냥 가면 다시 합쳐진다.

 

49 코스 지도

 

49 코스 안내판

 

진월초등학교

 

 진월초등학교를 지나 섬진강하구를 따라 망덕포구로 가는 길에 나무 테크가 설치되어 여행자를 도우며 풍광을 즐기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나무 테크가 곳곳이 부수어지고 썩어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너무나 아쉽게도 걷는 것 자체가 좀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도로를 따라 걷고 다음날 아침에 광양시 관광국에 전화를 하여 실태를 알리니 자기들은 몰랐다며 곧 보수를 하여 놓을테니 다음 주에 와 보라고 하였다.(내가 걸은 날이 일요일이라 당일은 신고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려고 갈 수는 없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두루누비를 보니 49코스에 내가 신고한 테크에 보행에 유의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런 일이 보람 있는 일이다.

 

망덕포구를 향해 가는 길

 

 망덕포구를 향해 가는 길에 윤동주의 시비로 가꾸어진 공원이 있다. 여기에 왜 윤동주 시비 공원이 있지? 하는 의문은 곧 풀린다. 조금 아래에 일제강점기에 윤동주의 시 원고를 끝까지 보관했던 정병욱의 집이다.

 

윤동주 시비 공원

 

망덕포구 

 

 망덕포구는 550리 섬진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호남정맥의 최장맥이면서 천자봉조혈(天子奉朝穴)의 명당이 많이 있다는 망덕산,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힐링할 수 있는 강변 데크산책로 등 빼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윤동주 시인의 작품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의 원고를 보존했던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 나비가 춤추는 형상의 무접도(舞蝶島)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쌓아두어서 미적도(米積島)라고도 하며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문화관광자원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망덕포구의 9월은 은근하게 깊어가는 가을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은빛 전어로 풍요롭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리는 이 가옥은 순결한 시어로 일제의 심장을 겨눈 윤동주의 육필시고가 살아남은 공간입니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 졸업 기념 시집 출간을 꿈꾸며, 육필로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부를 제본해 이양하 지도교수와 평소 아끼던 후배 정병욱에게 줬습니다.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잃었지만,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에서 살아남은 시고는 1948 1 30일 유고집으로 출간돼 윤동주를 시인으로 부활시켰습니다.

정병욱은 회고록 '잊지 못할 윤동주 형'에서 '내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주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일제 말기인 1944 1,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떠나기 전 그는 어머니에게 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 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그는 상경하자마자 윤동주 가족에게 원고를 보였고, 다른 작품을 찾아 시집 발간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윤동주 3주기인 1948, 유고 31편을 묶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출간할 수 있었다.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수필에서 동주의 노래소리는 이 땅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동주는 죽지 않았다 내 평생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은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시를 품은 집 정병욱 가옥은 1925년에 건립된 목조슬레이트 주택이다. 정병욱의 아버지 정남섭이 지었으며 1930 8 28일부터 조선탁주와 조선약주를 허가 받아 양조장과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집 앞에 섬진강 나루터가 있었으며 경관이 좋았다고 한다.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하고 있는 보기 드문 건축물로서, 2007 7 5일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제 341호로 지정했다. 현재 집 외관은 좌우측 증개축으로 인해 변형된 상태로 창고가 딸린 ''자 형이다.

 

정병욱 가옥

 

 정병욱가옥에서 조금 더 가서 오늘의 여정을 끝내고 숙박을 하기로 했다. 남파랑길을 걸으면서 항상 숙박할 곳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예정을 맞추어 움직인다.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다음 숙박소를 기약할 수 없어 숙박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졸복탕이 아주 맛이 있었다.

 

졸복탕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떠났다. 항상 걸으면서 저녁에는 조금 일찍 걷기를 멈추고 아침에는 일찍 걷기를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니 섬진강 저 너머에 해가 떠 있는 풍경이 보였다.

 

섬진강의 아침

 

배알도 별헤는 다리

 

배알도

 

 배알도 해변공원은 섬진강 하구 태인동의 맨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배알도라는 이름은 해수욕장 건너편의 망덕산(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배알도 해변공원은 섬진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배알도를 배경으로 해변을 따라 조성된 데크는 낭만적인 산책로이다. 백사장은 길이 500m, 넓이 50200m이고 진입도로를 확장함으로써 전보다 교통사정이 훨씬 편리해졌다.

 

 배알도 해변공원을 지나가면 태안도에 있는 광양제철소를 만난다.

태인도는 남해의 광양만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김 양식지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그곳의 바다를 메우고 광양제철소가 들어서 태인도를 포함한 16개가 넘는 유 · 무인도 섬이 사라지고 500만 평에 달하는 인공 섬이 생겨났다.

태인도에는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광양 김 시식지(始殖址)'가 있다. 1700년대 초반 광양현감을 지낸 허심이 김여익(1606~1660)을 추모하기 위해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은 없어졌으나 '시식해의(始殖海衣)'라는 비문 기록이 김해 김씨 족보에 남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밤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등의 가지를 베어다 마을 앞 애기섬(兒島) 주변의 갯벌에 꽂아 놓고 관찰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나뭇가지에 해의()가 붙어 자랐다. 김여익은 해의를 키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해의를 건조하는 방법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보급했다. 태인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이를 양식하고 그 제품을 하동 장에 내다 팔았다. 하동 사람들은 태인도 '김씨'가 만든 것이라고 ''(사투리로 짐)이라 불렀고, 이것이 김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광양제철소(光陽製鐵所)는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국가산업단지 안에 ()포스코에서 건설한 대규모 제철소이다. 19821기 설비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에 준공하였으며, 이후 19995고로가 준공됨으로써 모두 5기의 고로에 연간 1800t의 조강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밖에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대형 선박 5척을 동시에 댈 수 있는 국내 최대의 항만시설이 갖추어졌다.

 

 

 포스코광양제철소를 지나 백운둘레길을 계속 걸어서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중동근린공원이 나온다. 여기가 49코스의 끝이다.

 

무지개 다리 

 

길호마을 옛터 표지석

 

 49 코스는 거리도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도 편안한 길이라 한가롭게 걸었다.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기에 아침밥도 먹지 못해서 도중에 편의점에 들어가 도시락으로 때우고 다음 길을 위해 간식과 먹거리 구입하여 배낭에 넣고 길을 떠났다.

 

 항상 걸으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길을 떠난다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새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