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마음대로 가는 발칸 여행 - 헝가리 부다페스트 2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에스테르곰을 다녀와서 다음 날은 여행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 새 20일이 더 지났고,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아 휴식이 좀 필요한 시간이었다. 다음 날은 좀 바쁘게 움직였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밤에도 도나우강 유람선을 탈 예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서는 밤에 유람선을 타는 것은 필수 코스이다.

 

 먼저 간 곳이 유명한 국회의사당이다. 1904년에 완성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국회의사당은  네오고딕 건축물로 도나우 강변에 접하고 있다.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당시 헝가리는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동시에 헝가리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건물의 건설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국회의사당의 외벽에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지붕에는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있다. 도나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강을 따라 건설된 이 건물의 길이는 268m,폭은 가장 넓은 곳이 123m이다. 주 출입구는 다뉴브강변 맞은편인 라요시 코수트(Lajos Kossuth) 광장에 있다. 주 출입구엔 청동사자상이 장식되어 있고, 내부 중앙 돔은 높이 96m이다. 96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마자르족이 유럽에 최초로 정착한 896년을 뜻한다. 내부 중앙 로비에 16명의 헝가리 지도자 동상이 16개의 원주 위에 서 있는 것도 헝가리의 민족적 자존을 위한 건축적 표현이다.

   

 

국회의사당 전경

 

 

 

 

국회의사당 모습

 

 국회의사당 주변의 네 개의 인물상이 헝가리의 근대사를 너무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늘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 끝에 서 있는 페렌츠 라코치(Ferenc Rákczi)는 합스부르크에 반대해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1711년 망명에 올랐다. 북쪽의 라요시 코수트(Lajos Kossuth)는 역시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했으나 1849년 혁명 실패로망명에 올랐다. 같은 북쪽의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된 헝가리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으나 1919년 망명에 올랐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세워진 임레 나지(Imre Nagy)는 잘 알려진 대로 1956년 혁명의 총아였다. 임레 나지는 당시 총리로 혁명을 주도했지만 소련군의 침공으로 민중 혁명은 좌절되었고 2년 뒤 처형된 헝가리 현대 비극의 상징적 인물이다.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채 조각으로 남은 네 명의 정치가는 헝가리의 굴곡진 현대 정치사를 웅변한다. 그 비극을 바탕으로 결국 오늘의 정치 민주화를 이룩해낸 것이 바로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페렌츠 라코치(Ferenc Rákczi) 상

 

 

앞 광장에 있는 물을 가두어 시각적인 효과를 거두는 조형물

 

 

 

 

규모가 너무 크서 한장의 사진으로 찍기가 어려워 여러 부분을 찍었다.

 

 

 

 

 

외부를 장식한 아름다운 조각상들

 

 19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 시의 배경이 바로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코슈트광장이다. 1956년 구 소련에 항거한 부다페스트 대학생과 시민들이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소련군의 총탄에 쓰러져간 곳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헝가리가 공산주의체제를 끝내고 나서 이 광장에 그 때의 아픔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전시공간을 지하에 마련하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한 번 꼭 둘러 보시기를 바란다.

 

 

기념비

 

 

코슈트광장 조형물

 

 

 

그 때의 사건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1956년 자유를 부르짖다가 사라져 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국회의사당에서 보는 부다지구 풍경

 

 국회의사당을 뒤로 하고 부다 지구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체니다리를 건너야 한다.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세체니 다리(헝가리어: Széchenyi Lánchíd)는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로 1849년에 개통된 현수교이다.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의 아이디어로 시작하여 스코틀랜드인 클라크 아담에 의해 건설된 이 다리는 당시 경제와 사회 발전의 상징이었다. 세체니가 다리 건설에 나선 계기는 1820년 자신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차 급히 돌아온 세체니는 다뉴브를 건너지 못했다고 한다.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배편이 기상 악화로 무려 8일간이나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세체니는 다리를 놓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클라크는 공사기간 내내 다리 완공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부다 왕궁이 있는 바르 헤지(Var-hegy) 아래를 뚫는 터널까지 설계했다. 그래서 헝가리 인들은 부다 쪽 다리 입구의 광장을 '아담 클라크 광장'이라 명명하여 지금까지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일부 교량이 붕괴되었으나, 워낙 중요한 다리라 곧바로 재건되어 부다페스트의 경관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조형물로 남아 있다.

 

 다리의 이름은 다리 건설의 주요 후원자였던 세체니 이슈트반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밤을 밝히는 전구의 모습이 마치 사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 다리의 양쪽 입구에는 혀가 없다고 전해지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사자상의 자태는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하여 흠을 잡을 데가 없다고 한다. 세체니 다리는 잔잔한 기품과 안정적인 모습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업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밤이 되면, 380m의 케이블로 이어진 수천 개의 전등이 도나우 강의 수면을 비추며 지금은 부다페스트의 야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다리로 자리하고 있다.

 

 

 

세체니다리의 사자상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교각

 

 

세체니다리에서보는 도나우 강

 

 

부다의 언덕위로 올라가는 터널

 

 세체니다리를 건너 어부의 요새쪽으로 올라가려니 제법 언덕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올라 갔다. 버스가 마차시성당앞에 내려주기 때문에 편안하게 올라 왔다.

 

 마차시 성당의 정식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지만, 이곳의 남쪽 탑에 마차시 1세 왕가의 문장과 그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마차시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14세기 후반에 화려한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조된 것으로서, 1479년에 마차시 1세에 의해 대개축됨으로써, 높이 80미터의 첨탑이 증축되었고, 19세기 후반에 광범위하게 수복된 것이다. 700년이라는 교회의 역사 중 거의 모든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마차시 1세의 2번의 결혼식도 이곳 성당에서 행해졌다.

 

 13세기에 이 자리에 세워진 성당은 14세기에 고딕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오스만트루크가 침공하여 부다성을 손에 넣은 뒤 마차시 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리모델링했다. 이 와중에 내부 제대 등은 모두 파괴되었고 내부에 그려져 있던 호화스런 프레스코화는 흰색으로 칠해져 망가지고 벽면도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되었으며, 1686년에는 남쪽 탑과 지붕이 붕괴되기도 했다. 1686년 대 터키 전쟁 때 동맹 측의 대포에 의해 성당의 벽이 파괴되었을 때에, 예전부터 봉납되어 있던 마리아 상이 벽 속에서 나타났다. 기도 중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교도의 앞에 마리아 상이 나타나자, 부다 주둔군의 사기는 붕괴되고 부다는 함락되어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결되었다. 이로 인해, 마차시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있었던 장소"라고 불린다.

 

 이 성당은 19세기 말에서야 성당 본래의 장려한 자태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명성 높은 건축가인 건축가 슐렉 프리제슈에 의해 본래의 13세기의 설계도를 통해 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설되었던 당초의 고딕 양식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슐렉 프리제슈가 중세 폐허에서 발굴된 유품을 다시 사용해 본래의 고딕식 건물로 재건축했던 것이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 리스트가 '대관식 미사'곡을 초연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일요일 대미사를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페렌츠 에르켈 작곡의 '애국가'를 합창하는 것도 이 성당의 오래된 전통이다.

 

 

 

 

 

성당의 여러 모습

 

 

 

 

삼위일체탑

 

 마차시 성당의 주 출입구 앞에는 본래 중세 시장(市場)의 중심이었다는 삼위일체광장이 있고, 삼위일체탑 그곳에 서 있다. 이 탑은 본래 18세기 초 부다 시 위원회가 1691년 헝가리를 엄습했던 흑사병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이 흑사병을 끝내는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꼭대기에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비둘기 모습으로 온 성령이 흑사병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성당 출입구 위의 성화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

 

 

리스트의 악보

 

 

 

 

왕가의 문양

 

 

 

 

 

 

 

화려한 성당 내부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마차시 성당 전경, 기마상이 성 이슈트반 1세 상이다.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하여 지어진 아름다운 어부의 요새(Halaszbastya)는 마차시 성당 동쪽에 있는 백색의 요새로 1896년에 착공에 들어가 1902년에 완성되었고, 요새 앞에는 성 이슈트반의 기마상이 서 있다. 이곳의 이름이 어부의 요새가 된 것은 옛날 이곳에 어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설명부터 헝가리 애국정신의 한 상징으로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도나우 강의 어부들이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해 이 요새를 방어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이 요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곱 개의 탑이다. 고깔모양을 한 이 탑은 건국당시 마자르족 일곱 부족을 상징한다. 전체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얀 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 성당까지 뻗어있는 계단이 아름답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탑의 높이로 건국의 해를 기념했다면, 이곳은 일곱 개의 탑으로 건국의 주체를 기억 속에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부의 요새는 원래 마차시 성당을 보호하기 위한 건축물이었는데 워낙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마차시 성당보다 더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도시를 홍보하는 거의 모든 안내문에 나오는 이 요새는 산책하고, 앉아 쉬고, 아름다운 강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완벽한 장소이다. 낮에 보는 전망도 좋으나 해가 진 이후에 보는 야경이 더 아름답다.

 

 

어부의 요새 전경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세체니 다리 풍경

 

 

어부의 요새 탑과 이어진 회랑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국회의사당과 이슈트반 대성당

 

 

도도하게 흐르는 도나우 강

 

 

 

 

 요새를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마임을 하는 사람. 처음에는 밀납인형으로 착각했다. 그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 아이들이 지나갈 때 장난을 쳐서 사람인 줄을 알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들 처음에는 기겁을 했다. 인형인 줄 알다가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니 아이들은 더 놀랐다. 앞에 놓인 모자에 돈을 넣고 사진을 찍었다.

 

 

 

 

 

 

어부의 요새 탑의 모습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 아래층의 레스토랑에서 흘러가는 도나우 강을 바라보며 조금은 비싼 점심을 먹고 부다 왕궁으로 향했다. 언덕을 가로 질러 가면서 보니 부다왕궁터 주변은 아직 발굴이 진행 중이었다.

 

 부다 왕궁은 헝가리 국왕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성채이다. 13세기 몽고 침입 이후에 에스테르곰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벨라 4세는 방어를 위해 높이 솟은 부다의 언덕에 최초로 왕궁을 지었다. 부다 왕궁은 중세와 바로크, 19세기 양식의 가옥들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한 옛 성곽 지역(Várnegyed) 옆에 있는 부다 언덕 남쪽 꼭대기에 지어졌다. 아담 클라크 광장과 푸니쿨라(계단식 열차) 옆 세체니 다리와 이어져 있다. 이후 마차시 왕 시절에 모든 건물들은 르네상스 스타일로 변형되었고, 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사에 의해 개축되었으나, 전쟁과 화재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19세기 후반부터 대대적인 보수가 시작되었으나 완공은 왕이 없어진 1950년이었다. 지금은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 국립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현장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헝가리 미술을 대표할 만한 많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2층에는 19세기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없는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관람을 권하고 싶다.

 

 

 

 

미술관 외부의 조각상

 

 미술관은 개방하는 시간이 있어 왕궁의 외부는 뒤에 보아도 되기에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미술관부터 들어갔다. 그런데 폐장 시간가지 다 보지 못해서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하고 아쉽지만 나와야 했다. 미술관의 작품을 감삼해 보시기를.....

 

 

 

외부 계단에 걸려 있는 대작들

 

 

 

 

 

 

 

 

 

 

 

 

 

 

수 많은 작품등 중 내가 흥미를 가진 작품들이다.

 

 

부다왕궁

 

 

왕궁에서 보는 세체니 다리

 

 

 

 

부다왕궁

 

 이 왕궁에서 한국의 단체 관광객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왜 단체관광객들은 그냥 바깥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궁 바깥에서 무리를 지어서 강만 보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부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구경하면 좋을텐데......

 

 왕궁을 나와 다시 걸음을 엘리자베스 다리 쪽으로 옮겨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갔던 겔레르트언덕과 시타델라요새로 갔다.

 

 

 

멀리서 보는 겔레르트 언덕

 

 

 

엘리자베스 다리

 

 겔레르트 언덕은 해발고도 220m로 부다 지구의 도나우 강변에 있으며, 북쪽에 있는 옛 왕성의 유적과 도나우 강 동쪽 기슭에 펼쳐진 페스트 지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옛날에는 케렌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11세기에 이 언덕에서 순교한 성 겔레르트를 기리기 위해 개칭하였다고 한다.

 

 겔레르트 언덕은 헝가리 근대사의 슬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꼭대기의 시타델라 요새는 합스부르크제국이 만든 것으로 이 시타델러의 기능은 오로지 페스트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던 헝가리 독립운동 감시용 망루였다. 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건설된 성벽의 길이는 200m, 높이는 4~6m 그리고 벽의 두께는 1~3m이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화해 협정이 체결되면서 요새 해체를 요구했으나 이후에도 30년간 군대가 주둔했고 1897년에 철수하면서 상징적으로 정문만 파괴했다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이 이 요새에 방공포대를 설치했고, 요새의 다른 쪽은 전범수용소로 이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은 전승의 기념으로 1947년 시타델라 꼭대기에 높이가 40m에 달하는 소녀의 동상, 이른바 '자유의 여신상'을 세웠다. 이 소녀는 두 팔을 지켜든 채 승리를 뜻하는 종려나무를 펼쳐 들어 보인다. '소련군이 마침내 승리했다'는 징표다.

 

 이 땅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자유의 여신상' 철거가 제기되었으나, 그들은 영광도 치욕도 그들 역사의 일부분이고 또 그 기념비 보존을 통해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의 '자유의 여신상'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승리의 종려나무를 펼쳐 보이고 있다.

 

 겔레르트 언덕의 중간쯤에 거대한 석상이 다뉴브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이 언덕의 주인공이자 수호신인 성 겔레르트이다. 성 겔레르트는 본래 이탈리아의 베네딕트 수도회 수사로 본명은 지라르도(Girardo)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거물이었던 그는 헝가리의 이슈트반 왕을 도와 마쟈르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려는 의도로 파견된다. 그러다 1045년 그는 이교도들에게 붙잡혀서 헝가리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성 겔레르트 동상은 그가 통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했던 바로 그 언덕에 세워진 것이다.

 

 

언덕 위에서 보는 도나우 강

 

 

 

시타델라 요새

 

 

 

 

요새에서 보는 부다페스트의 풍경

 

 

소녀상 - 빛이 역광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요새에서 보는 도나우 강

 

 

몇 일 전 연주를 들은 성당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 오니 벌서 저녁이 되었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유람선을 타러 갔다. 도나우 강변에는 유함선이 지천으로 있다. 자기가 가고 싶은 코스를 골라서 타면 된다. 요금도 그렇게 비싸지 않으니 부다페스트를 가면 꼭 밤에 유람선을 타기를 바란다. 유람선을 타니 한국의 젊은이들을 몇 명 있었다. 젊을 때 저렇게 다닐 수 있으니 좋다. 내가 젊을 때는 외국이라고는 꿈도 못 꾸던 때였는데 시대가 이렇게 많이 변했다.

 

 

 

부다왕궁

 

 

어부의 요새와 세체니 다리

 

 

 

국회의사당

 

 

 

 

 

겔레르트 언덕

 

 

 

 

비가도

 

 유람선을 타고 도나우강을 왔다갔다 하면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고 나니 어느 새 밤 12가 되었다. 오늘 하루는 참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다페스트 일대를 걸어다니며 구경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감탄을 발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 부다페스트를 '다뉴브의 진주'라 부르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곳곳에 펼쳐진 명승지도 아름답지만 그 명승지에서 바라보는 부다페스트의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지난 번에 베오그라드를 거쳐 오면서 베오그라드를 꼭 다시 오겠다고 생각했는데, 부다페스트는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구석구석을 즐겨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