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서해랑길 61코스(깊은골버스정류장 - 오포버스정류장 - 보령LNG터미널 - 갈매못순교성지 - 충청수영성)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서해랑길 61코스는 깊은골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내륙으로 걸음을 옮겨서 길을 가면 오포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여기서 교성천을 따라 계속 길을 가면 엄청나게 큰 부지에 자리잡은 보령LNG터미널이 나온다. 보령LNG터미널을 지나서 해안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천주교에서 순교성지로 손꼽히는 갈매못순교성지가 나온다. 여기서 도로를 따라 계속가서 충청수영성입구에서 이 코스가 끝이 나는 8.7km의 아주 짧은 길이다.

 

61코스 시작점 표시

 

 앞의 60코스에서 시작점 안내판을 이야기한 것같이 61코스에도 시작을 알리는 안내판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각 코스를 시작할 때 안내판을 보고 그 코스의 대략적인 이해를 하는데 보령 구간에 들어오니 갑자기 안내판이 사라져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61코스 시작점 표시는 주의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라 모형의 마을 표지

 

 마을 이름이 깊은골이라서 상당히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가? 짐작을 하고 걸으니 제법 깊은 골짜기로 길을 인도하다. 지금은 도로가 나 있지만 옛날에는 진짜로 깊은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골 태양열 발전단지를 지나서 제법 걸어가니 오포버스정류장이 나온다.

 

깊은골의 여러 풍경

 

오포버스정류장

 

 

보령화력발전소

 

 오포를 지나 교성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제법 큰 도로가 나오고 그 도로를 따라가면 나타나는  보령LNG터미널()201212GS에너지와 SK E&S가 공동투자에 합의한 국내 최대 민간 상업용 LNG터미널로, 20132월에 합작법인을 설립하였고, 4년여 간의 건설공사 뒤에 201711일에 상업운전을 하였다.

 2020년 현재로 20규모의 LNG 저장탱크 6기와 연간 600만톤의 LNG를 직도입 할 수 있는 하역부두(2선좌), 기화·송출 설비 및 천연가스의 열량 조절용 LPG 열조시설과 7.7규모의 LPG탱크 1기를 갖추고 있다. 보령LNG터미널은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겠다는 방침으로 5,6호기와 함께 추가 건설 중인 7호기 건설 사업은 20237월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었으며, 최근 8~9호기 설계작업에도 착수했다.

 

보령LNG터미널

 

 보령LNG터미널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오천항으로 가는 해안길이 나온다. 바다의 풍경을 즐기며 그 길을 따라가면 천주고신자라면 한 번쯤은 가는 갈매못순교성지가 나온다.

 

 

 

 갈매못순교성지는 보령시의 북서쪽 오천면 영보리에 위치하고 있다. ‘오천(鰲川)’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영보리의 영보(永寶)’는 영원한 보물이 있다는 뜻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며, 그 앞바다가 섬과 육지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과 같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하며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만으로도 영적인 곳이다.

 

 천주교 갈매못순교성지는 1866323일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보령에 있는 충청수영으로 이송되어 신자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스스로 순교의 길을 간 프랑스 선교사인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성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세 사람과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회장 두 사람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 등 5명과 그 외 수많은 천주교인의 순교지이다, 사제와 평신도 다섯 성인이 1866330일 수영 근처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로 현재 순교자기념비, 기념관 등과 다블뤼 주교의 유품과 유물이 소장돼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성지이다.

 이때 순교한 성직자 3명의 유해는 현재 명동 성당 지하실에 안치되어 있다.

샤를 달래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갈매못성지를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형장은 바로 충청수영의 수군들 훈련장이었다.

 

 갈매못이 형장(刑場)이 된 이유로는 흥성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1846(현종12) 6월에 프랑스 함대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의 수영을 택하여 5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바라보고 목을 쳐서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병인년 3월은 고종의 국혼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던 때라, 당시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니, 250리 밖으로 내보내어 형을 집행케 하라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어 군문효수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다.

 

 갈매못순교성지는 부여군 금사리 쇠양리 본당 주임이었던 정규랑(레오)신부가 적극적인 노력으로 순교현장을 발굴하였다. 1925년 정규량 신부는 주변의 여러 신부들과 함께 갈매못 순교현장을 발견한다. 정규량 신부는 처형된 다섯 성인의 시신을 몰래 파서 홍산지방 석죽골로 이장한 공소에 생존해 있었던 이들의 도움과 같은 목격증인으로 고증해준 사람들과 함께 성인들의 머리가 걸렸던 장깃대가 세워졌던 자리와 참수하던 자리 그리고 임시로 매장했던 세 구덩이를 확인했다.

정규랑 신부는 서둘러 그 땅 20평을 사들여 등기하고(1926914) 19291월에 서울 천주교 재단 법인에 기증하게 된다. 오기선 신부의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는 정규량(레오1883-1953)신부가 이곳 갈매못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교터의 요약 설명

 

순교자들의 비

 

갈매못순교성지의 여러 모습

 

 갈매못순교성지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소성전으로 가니 여러 신자들이 평일 미사를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중년의 남자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미사 시간을 보니 내가 참여하기에는 나그네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성지를 나와 해안을 따라 걸었다.

 

오천항으로 가는 바다 물길

 

 해안에 난 길을 따라 걸어 충청수영성 가까이 가니 많은 식당들이 보였다. 때가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기에 식당에 들어가 맛있게 포식을 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밥을 제대로 못 먹을 때가 많아 밥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항상 많이 먹고 다음 길을 떠나는 것이 여행에서 생긴 습관이다.

 

 

 충청수영성 입구에서 이 코스는 끝이 난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역사의 현장을 지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느낌을 주었다.

 바로 이어서 다음 코스의 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