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부산 갈맷길 3코스 2구간(부산진시장 - 남항대교)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갈맷길 3코스 2구간은 부산진시장에서 남항대교까지다.

 

 이 구간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영화 '친구'로 유명한 범일동에서 진시장, 정공단, 증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배놓을 수 없는 곳이다. 부산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인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지나 만세운동 거리를 지나면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산복도로를 만날 수 있다. 산복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엿보면서 길에서 부산항을 바라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맛을 보여 준다. 산복도로를 벗어나 부산역으로 내려서면 옛 부산의 추억이 아련한 차이나타운과 상해거리가 나온다. 영선고개를 넘어 피난시절의 애환이 서린 40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대청로를 건너면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를 기리는 백산기념관과 용두산 타워가 있고, 용두산공원을 내려와 광복동, 남포동 거리를 지나면 골목골목에 없는 것이 없다는 국제시장과 일명 깡통시장으로 알려진 부평시장이 나온다. 지금은 piff광장인 옛 남포동 극장가를 넘어서면 억센 부산 사투리가 다정하게 들리는 좌판을 펼친 자갈치 아지메들의 정감어린 목소리가 가득 넘쳐나는 자갈치시장을 지나면 6.25 전쟁때 피난민의 추억과 애환이 서린 도개교이며 연육교인 영도대교를 만날 수 있다. 영도다리를 건너 해안을 따라 걸으면 남항대교에 다다르고 이 구간은 끝이 난다.

 

부산진시장의 모습

 

 부산진시장은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부산장의 명맥을 이은 유서 깊은 시장이다. 개항 이후 부산의 중심 시장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한복과 포목, 폐백 등 혼수 전문 시장으로 특화되어 전국 3대 혼수 전문 시장으로 손꼽힌다.

 

 부산진시장을 벗어나면서 좌천동가구 길을 지나 좌천동 뒷편으로 들어서면 먼저 마주치는 곳이 정공단이다. 정공단은 좌천동에 있는 석단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배향하는 곳이다.

 

정공단의 여러 모습

 

 정공단에서 불과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좌천 동굴이 있다.

 부산에서 오래 살은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에 판 동굴인데 해방이 되고난 뒤 이 동굴에 조그마한 간이음식점이 들어서서 막걸리와 파전 등을 팔던 주막이었다. 부산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낭만과 추억을 주던 장소이다. 나도 대학을 다닐 때 이곳을 제법 드나들었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발길이 잘 가지 않았다. 중간에 간이 주점을 운영하지 않다가 뒤에 또 운영을 하곤 했는데 동굴이 눈에 뜨이어 너무 반가왔다. 동굴로 가니 지금은 장사는 하지 않고 기념이 되는 장소로 광광객들에게 옛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무 반가왔다.

 

좌천동굴의 내부와 외부

 

부산진교회 -부산 최초의 기독교 교회

 

부산진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고의 전신)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일신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로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선교 활동의 하나인 교육 사업으로 1895년에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시작하여, 1909년 8월에 사립 학교의 인가를 받고,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는데,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5년에는 동래구 복천동에 신축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1940년에는 동래 지역의 유지들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동래학원]을 만들어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명을 동래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동래학원이 되었다.

 

만세거리의 모습

 

 이 곳은 부산이 오늘날의 대도시로 형성되기 이전에 조선말부터 부산포로 개항의 중심지로 부산의 원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20세기 초의 여러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올 때의 모습과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나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만세거리는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리로 교육의 한 장소로도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 거리를 지나 산복도로를 향해 올라가면 부산항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산복도로에서 보는 부산항의 모습

 

증산공원

 

증산공원에서 보는 부산의 모습

 

증산둘레길

 

산복도로를 따라 걸으면 만나는 풍경

 

 산복도로에서 내려가면 부산역을 만난다.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어야 하는 역인데 우리의 현싷이 아직은 그렇게 되지 못하여 안타깝다.

 

부산역 전경

 

부산역 근방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상해거리

 

 부산역에서 큰 대로를 따라 걷다가 중앙동 뒷길로 들어선다. 여러 가지로 우리 역사의 현장인 곳이다.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은 세대에게는 이 거리는 삶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대표적난 40계단이 있다. 이 40계단을 지나면 백산 안희제선생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동 뒷길 거리

 

40계단과 그 주변 조형물

 

백산기념관

 

 백산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이다. 이분에 대한 설명은 내가 구차하게 할 수가 없으니 생략한다. 단 기념관에 있는 안내인에게 물으니 유해는 의령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아주 어릴 때(국민학교) 읽은 기억이 있어서 '임정 36호'에 대해 물으니 안내인이 깜짝 놀란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자기들도 몰랐는데 몇 년전에 누가 이 이야기를 해서 보수동 책방을 샅샅이 뒤져서 그 책을 찾았다며 보여준다. 나도 아득한 옛날에 읽었는데.... 이 소설책은 아니고 어디에서 읽었는지도 모른다. 벌써 60년이 다 되어가는 옛날 일이다.

 

 백산기념관을 나와 길을 걸으면 부산의 대표적인 용두산공원에 도착한다. 용두산공원은 이승만대통령의 호를 따서 옛날에는 '우남공원'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일어나고 명칭이 바뀌었다. 용두산(49m)은 부산시내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 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하였다가 그후 산세가 흡사 용 모양이어서  용두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제식민지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신사(神社)를 세웠던 산이며, 지금은 척화비, 충혼탑, 4 ·19의거기념탑, 이충무공 동상 등이 있고, 부산탑이 세워졌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을 지었는데 2차에 걸친 대화재로 모두 타버리고 민둥산이 되었으나, 그 후 나무를 심고 가꾸어 지금은 나무가 울창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당기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했다. 부산항과 영도가 내려다보이는 경승지이며, 특히 부산탑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아름다운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지 공원이다.

 

용두산공원의 여러 모습

 

 용두산공원에서 옛날 기억을 되살리니, 내가 어릴 때는 이승만대통령의 흉상이 있었다는 생각이 나서 관광해설사에게 "이승만대통령 흉상이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런게 있었느냐고 반문을 한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적게 보이니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문화해설사라면 그런 것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용두산공원을 내려와서 광복동, 남포동 거리를 지나 국제시장 부평동시장 등을 보면서 piff광장을 지나 자갈치로 들어선다.

 

piff광장

 

 자갈치시장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름을 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자갈치 아지매로 상징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산물시장으로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이 반드시 들렀다 가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부산 시민들이 회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을 즐기는 곳이다. 시장의 형성이라든지 유래 등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에서보는 영도대교

 

자갈치시장에서 보는 영도와 유람선

 

 자갈치를 벗어나 이제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로 들어간다.

 

이정표

 

영도대교 - 영도다리가 더 친근한 이름이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영도다리로 더 친근하게 불리는 영도대교는 부산시 중구와 영도구를 잇는 동양 최초, 국내 유일의 대규모 도개교이다. 영도다리는 우리나라 대중예술의 소재로 매우 많이 사용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내가 어릴 때는 도개교여서 영도다리를 드는 시간에 맞추어 구경을 가곤 했는데 1966년 9월 1일에 도개를 멈추었다. 그러다가 다리를 다시 수리하고 확장을 하면서 2013년부터 하루에 한번 정오에 다시 다리를 들고 있어 이 시간에 맞추어 구경을 오는 타지 사람들이 매우 많다.

 

영도다리 위에서보는 풍경

 

현인의 '굳세아라 금순아' 노래비 - 영도다리 건너 영도경찰서 옆에 있다.

 

영도다리에서 남항대교 가는 해안길

 

절영해안길 안내도

 

 영도다리를 지나 남항대교쪽으로 가면 절영해안산책로 안내도가 나온다. 여기가 3-2 구간의 끝이며, 3-3 구간의 시작점이다.

 

 3-2 구간은 부산의 원도심 구간으로 부산 근대화의 산 증인이며, 우리나라의 최고의 수난기였던 한국전쟁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전쟁의 아픔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던 피난민들의 삶의 장소였던 여러 시장들, 그들이 집을 짓고 거주하던 산복도로변의 거주지,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갔다왔다하던 영도다리 등등은 우리나라의 슬픈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잘 볼 수 있는 모습이 이 구간에서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