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의 오딧세이(Odyssey)

허균과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

鶴이 날아 갔던 곳들/발따라 길따라

 비운의 문인이었던 허균과 난설헌을 가슴에 새기자.

 

 강릉 경포호 부근에 ‘허균·허난설헌 생가터’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허난설헌은 1563년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 딸로 이름은 허초희(許楚姬)이다. 난초(蘭)의 청순함과 눈(雪)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난설헌’이라 호를 지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그리고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남동생 허균이 집안에 흩어져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1608년에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던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였다. 허균은 분명 시대의 이단아였다.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난 글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져 있는 <홍길동전>이 있다. 그 외에도 그의 여러 글에서 그의 생각과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허균과 난설헌은 분명 시대를 부합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들의 생애에는 많은 어려움과 질곡이 있었지만 먼 뒷날인 오늘날에는 그들의 삶은 더 조명을 받고 있다.

 

 시대를 앞서가며 세상을 자신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려 했던 그들의 사상을 머리에 새기며 그들의 생가와 남긴 자취를 엿보자.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전경

 

 

 

허난설헌 유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경포대 주변에 있다)

 

 

허난설헌유적지의 안내도

 

 

허난설헌 생가의 입구

 

 

 

허난설헌 생가의 전면

 

 

 

난설헌 생가에 있는 매화나무

 

 

 

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과 난설헌 영정

 

 

난설헌 생가의 조망

 

 

 

허씨 집안 5 문장가의 시비 : 허씨 5문장가 (, , , 허난설헌, 허균)

 

 

허난설헌 조상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입구

 

 

 

허균과 난설헌의 작품들 : 내부에 여러 글이 있으나 소탈하다. 

 

 

 

기념관의 전경

 

* 여기서부터는 허난설헌의 높은 기품을 기려 강릉의 다도회에서 기념관앞에 열어 놓은 찻집을 소개한다.

 장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잔의 차를 음미하면서 허난설헌의 높은 기품을 생각해 보기 위해 열어 놓은 곳이다.차를 얼마를 마시더라도 단돈 천원(1,000원)만 내면 된다. 천원에 차뿐만 아니라 약간의 유과와 떡도 준다. 기념관을 둘러 본 후에 기념관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여유롭게 차를 즐기자.

 

 

 

 

찻집의 전경

 

 

맑고 향기로운 녹차와 유과

 

 

 

 

찻집 내부의 모습

 

 

 

 

 

 

찻집의 여러 모습

 

 

 

 

기념관 정문

 

 

 

 

기념공원 표지석과 그 앞에서 보는 기념관 전경

 

 

 강릉에는 많은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신사임당과 율곡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분들은 덜 알려져 있다.

그 중 허균과 허난설헌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 보지 못한 비운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난설헌은 너무 일직 일생을 마쳤기에 그의 일생이 제대로 알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글재주는 오늘에도 남아 우리에게 전하여 진다.

 

 또 허균은 그녀의 동생으로 광해와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로 세상을 올바르게 경영하고자 했으나 시대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그으ㅢ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당시의 조선사회가 어떻게 변했고, 우리 사회도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 가정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강릉에 발길을 옮기는 사람들은 꼭 허균과 난설헌을 생각해 보며 그들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