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1 코스(오륙도해맞이공원 - 부산역)
작년(2021년)에 동해안 해파랑길을 완주하고 올해는 남해안 남파랑길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고 지도를 보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피하고 날이 따뜻해지면 걷기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3월이 되어 남파랑길 완주에 도전하게 되었다.
남파랑길은 ‘남쪽의 쪽빛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연결된 총 90개 구간의 1470km의 걷기 여행길로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을 잇는 코리아둘레길의 남해안 구간으로, 2016년에 개통한 해파랑길에 이어 두 번째로 2020년 10월 31일 개통됐다.
남파랑길은 광역 지방자치단체 3곳(부산, 경남, 전남)과 기초 지방자치단체 23곳에 걸쳐 있다. 남파랑길은 구간별 특성을 담아 ‘남도문화길’과 ‘남도낭만길’ 등 5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돼 있다. 남도문화길은 장흥에서 강진, 완도, 해남으로 이어진 구간으로 남도 유배문화와 다양한 순례 자원을 체험할 수 있다. 남도낭만길은 여수에서 순천, 보성, 고흥으로 이어진 길로 지역의 독특한 생태환경과 다도해의 낭만을 체험할 수 있다.
남파랑길의 권역 구성은 아래의 표와 같다.
권역 | 지역 | 코스 | 거리 | 거점권역 |
부산.경남권 | 부산 | 01 - 05 | 91.8km | 부산역/남포동/다대포 |
창원 | 06 - 11 | 89.7km | 진해드림로드/마산항 | |
고성 | 12 - 12/31 - 33 | 87.6km | 고성읍내 | |
통영 | 14 - 15/28 - 30 | 78.5km | 통영항 | |
거제 | 16 - 27 | 168.5km | 지세포항/구조라항/남부면 | |
사천 | 34 - 35 | 22.9km | 삼천포항 | |
남해 | 36 - 46 | 161.6km | 독일마을/상주면 | |
하동 | 47 | 27.6km | ||
전남권 | 광양 | 48 - 51 | 61.4km | 광양읍 |
순천 | 61 - 62 | 38.5km | 순천만 | |
야수 | 52 - 60 | 120.6km | 해양엑스포/소호항 | |
보성 | 63/77 | 33.3km | 벌교/율포 | |
고흥 | 64 - 76 | 214.2km | 녹동항 | |
장흥 | 78 - 80 | 66.1km | 회진항 | |
강진 | 81 - 84 | 62.4km | 마량항 | |
완도 | 86 - 88 | 57.9km | 완도항 | |
해남 | 85/89 - 90 | 45.9km | 땅끝마을 |
남파랑길 1 코스는 오륙도 유람선선착장에서 부산역까지로 부산의 옛날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구간은 부산의 걷기 길인 갈맷길과 많이 중첩되는 코스다. 2020년에 갈맷길은 완주하였기에 대단히 눈에 익은 길이었다.
오륙도를 벗어나서 아파트단지 앞에 난 길을 걸어 지금은 해군작전사령부인 백운포를 지나면 신선이 노닐던 신선대가 과거의 웅장한 부산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한 때는 우리나라 수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신선대를 한 바퀴 돌아 부산의 앞 바다를 보고, 시가지 쪽으로 내려서면 세계에서 하나 뿐인 UN기념공원이 있다. 바로 밑에는 선사시대부터 근, 현대사까지의 부산을 일람할 수 있는 부산박물관이 있지만 실제 걷기 길은 부산문화회관을 통과하여 우암동 장고개를 넘어 영화 '친구'로 유명한 문현동 곱창골목에서 부산진시장을 지나고 이어서 일제감정기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어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동포들과 한국전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범일동, 좌전동, 수정동, 초량동의 산복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내려가서 부산역 광장에서 이 코스는 끝난다.
출발점인 오륙도의 모습
동해와 남해 분기점 표지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오륙도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바다는 동해와 남해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표지판을 만들어 놓았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길, 남파랑길) 시작 표지
계속 길을 따라 걸으면 백운포가 나타난다. 백운포 마을(白雲浦)은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로 동쪽 해안 절경지의 바다에 흰 구름(白雲)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백운포(白雲浦)라 불렀다고 한다.
백운포는 매립되면서 논밭 둘레에 있던 차돌이 공사용으로 없어지면서 파도와 바람을 막기 어려워져 점차 논밭이 없어지고 인가도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는 매립되어 백운포 체육공원이 조성되었고, 지금은 대한민국 해군작전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백운포
남파랑길 길 안내 표시
백운포에서 조금 더 가면 신선대가 나온다.
신선대(神仙臺)는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해변의 좌안에 황령산에서 뻗어 나온 우암반도의 남단에 해당하며, 용당동 해변 좌안의 바닷가 절벽과 산정(山頂)을 총칭한다. 신선대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는 신선이 연관된 여러 가지 전설이 서려 있다.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산에 올라서서 앞을 바라보면 부산만 너머로 조도(朝島)가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오륙도와 흑석도 등 수려한 바다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신선대마루를 올라가는 길은 1796년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 함정 '프로비던스'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앤드루왕자길이다.
신선대로 올라가는 길
신선대 길에서 보는 오륙도
신선대 정자
영국 군함이 처음 부산에 방문한 기념비와 기념식수한 나무
신선대에서 보는 부산항
신선대를 벗어나 언덕길을 계속 걸어 도착한 곳이 유엔기념공원(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이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유엔군 묘지로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지명한 세계 유일의 묘지로서,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큰 곳이다.
유엔기념공원(UNMCK)은 1951년 유엔군 사령부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되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하여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유엔군 묘지이다. 처음에는 참전국 전사자 11,000위가 봉안되었으나 많은 유해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약 2,300 여기가 남아 있다.
그밖에 한국에서 전사하였으나 무덤이 없는 영국연방군 38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탑과 UN군 참전기념탑이 있다. 묘지 내의 초목은 대부분 각국 정부, 각 기관과 개인이 기증한 것이다.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놓여 있다.
하지만 코로나의 영향으로 이 공원을 관통하는 길을 막아 놓아 부산시립박물관 옆을 돌아가게 하였다.
UN기념공원 조형물
부산문화회관
유엔기념공원 바로 밑에는 부산시립박물관이 위치하고 옆에는 부산문화회관이 있다. 남파랑길은 부산문화회관을 돌아서 나가는 길이다.
여기에서 구 부산외국어대학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려 감만 부두와 우암동 부두를 보면서 길을 가서 지금은 한참 재개발로 인가라고는 보이지 않고 공사 중인 문현동 안동네를 지나 산길을 지나면 유명한 문현동 곱창골목을 통과하게 된다. 이 산길을 걸어가면서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백매와 홍매가 피어 있는 조그마한 농원도 구경하고 길가에 핀 동백도 보면서 봄이 왔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문현동을 벗어나 시가지 길을 따라 걸으면 부산진시장이 보이고 부산진시장을 옆에 두고 범일동 지역으로 들어간다. 과거의 부산이라면 이곳이 부산항의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물론 아득한 옛날이었지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라는 말과 같이 지금은 서면이나 해운대지역이 번성을 누리지만 부산의 원도심으로 원래 부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라 벅찬 희망을 가지고 부산의 골목골목을 걷는 상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부산진시장은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부산장의 명맥을 이은 유서 깊은 시장이다. 개항 이후 부산의 중심 시장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한복과 포목, 폐백 등 혼수 전문 시장으로 특화되어 전국 3대 혼수 전문 시장으로 손꼽힌다.
부산진시장을 벗어나면서 좌천동가구거리 입구에서 좌천동 뒤편으로 들어서면 먼저 마주치는 곳이 정공단이다. 정공단은 좌천동에 있는 석단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배향하는 곳이다.
정공단을 지나 산복도로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옛 건물을 만난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일신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으로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선교 활동의 하나인 교육 사업으로 1895년에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시작하여, 1909년 8월에 사립학교의 인가를 받고,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25년에는 동래구 복천동에 신축 이전하고 동래일신여학교라고 교명을 바꾸었다. 1940년에는 동래 지역의 유지들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동래학원)을 만들어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명을 동래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동래학원이 되었다.
이곳은 부산이 오늘날의 대도시로 형성되기 이전에 조선말부터 부산포로 개항의 중심지로 부산의 원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20세기 초의 여러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어올 때의 모습과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나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만세거리는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리로 교육의 한 장소로도 가치가 있는 곳이다.
부산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인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지나 만세운동 거리를 지나면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산복도로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을 지나서 산복도로 쪽으로 가는 길은 아주 가파른 계단길이다. 2년 전 갈맷길을 걸을 때 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엄청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푸니쿨라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서 마을 주민들의 통행을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다. 낭만을 즐기면 계단 길을 올라가도 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리하게 올라가도 된다.
도로 아래와 위를 이어 주는 엘리베이터
산복도로로 가는 도중에 증산공원을 만난다. 부산광역시 동구 성북로 36번길 46번에 있는 증산 공원(甑山公園)은 1982년에 개장한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있는 도심 속 근린공원으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공원은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공원 일대에는 조선 초기에 축성된 부산진성이 있다. 증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가마솥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증산공원의 모습
증산공원을 지나 부산의 스카이 웨이인 산복도로를 걸어서 수정동 뒷길로 들어사 수정산 기슭을 지나면 초량 이바구길로 가는 구봉산 치유숲길이 나오며, 이 길을 따라 걸어 산복도로로 내려가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청마 유치환의 우체통이 나온다.
구봉산 치유숲길
유치환 우체통
산복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엿보면서 길에서 부산항을 바라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맛을 보여 준다.
산복도로에서 보는 부산항(부산항대교)
168계단 모노레일
168계단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오면 초량 이바구길을 만난다. 옛날에 학교가 별로 없던 시절(일제감정기를 벗어난 그 시절)에 부산의 유명인사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모두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학교 담벽에는 그들을 기려 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초량이바구길
초량이바구길을 지나서 조량전통시장을 통과하면 부산역 앞으로 간다.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남파랑길은 텍사스거리를 지나게 한다.
텍사스거리
텍사스거리를 지나면 부산역광장으로 나간다.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어야 하는 역인데 우리의 현실이 아직은 그렇게 되지 못하여 안타깝다. 여기서 남파랑길 1 코스는 끝난다.
남파랑길을 걸으면서 부족함을 느낀 점을 간단하게 기술해 보겠다.
1. 시작점과 종착점의 표지가 전혀 없다. GPS를 의존하여 걷는데 종착점에는 어떤 표시를 해 놓았으면 한다. 정확하게 종착점을 알 수 없다.
2. 길 안내 표시가 충분하지 않다. GPS에만 의존하기보다 표시를 보고 걷는 수도 있는데 해파랑길이나 갈맷길에 비해 안내 표시가 부족하다.
3. 안내 표시가 정확하지 않는 곳이 많다. 길표시(붉은색, 파란색)가 거꾸로 붙어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4. ,GPS 매칭율이 좀 세련되었으면 한다. 신선대를 한바퀴 돌고 나니 길을 벗어났다고 제대로 매칭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노고를 폄하할 의도는 아니다. 많은 노고로 이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