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다리54 2018. 6. 4. 16:07

 갑자기 백제가 보고 싶어졌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부여로 향했다. 언제나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싶으면 집을 떠나는 나를 보고 옛날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은 역마살이 끼였다고 했다. 하지만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면 떠나야만 마음이 편했다. 40년전 옛날대학을 다닐 때는 수업을 하던 도중에도 강의실을 나와 몇 일을 돌아다니다가 학교로 가곤 했는데, 그 때 교수님들이 이해를 잘 해 주셔서 무난하게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부여행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예전에 알던 부여가 아니라 너무 생소하다. 부여도 내가 나이를 먹은 것 처럼 참 많이 변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가 사비성, 곧 부여다. 부여는 새벽의 땅으로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고요한 고장으로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은 부여는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그 평화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져 온다.

 백제의 고도 부여는 역사 속의 영화만 남긴 채 얼마 안 되는 백제 유적과 유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두고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과 부소산 낙화암 자락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변이며 백제의 옛 도읍터다.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는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 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백제의 자랑 백제금동대향로

 

 

성왕상

 

 

 

유적지 복원과 표지판

 

 

 

백제역사유적지구 설명판

 

 

 

부여현관아와 옛 부여박물관 건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

 

 부소산성 앞에서 점심을 먹고 주인과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주인은 부여도 많이 개발되고 변하였다고 하며 부소산성을 비롯해서 돌아볼 지역을 이야기 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는 곳이지만 주인의 친절함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부소산으로 향한다.

 

 부소산은 쓸쓸함 그 자체이다. 영화롭던 왕성은 자취도 없어지고 지금 유적이라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현대에 복원한다고 지은 것인데 얼마나 예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지가 의문이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0미터 정도 남짓한 작은 산이다. 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으로 끼고 돌아 남쪽에 넓은 평야를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굽어 흘러 강경을 거쳐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으로 막아선 배산임수의 형상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는 점에서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아마도 그 때 백제는 신라보다는 고구려를 더 경계하였던 모양이다.  이 부소산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 있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동성왕500년경에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 안에 백제 군대의 곡식 창고라 할 수 있는 군창터가 발굴되었는데, 검게 탄 쌀과 보리 콩 등의 곡식이 발견됐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던 흔적으로 추정한.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 아래, 백마강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6모 지붕의 백화정이 있다.

 

 

부소산 올라가는 입구의 산문

 

 

 

부소산 올라가는 길과 부소산 유적지 이정표

 

 

 

 

 

  

 

삼충사에 모신 백제의 충신 - 좌에서부터 성충, 흥수, 계백의 초상

 

 

 

 

영일루

 

 

 

 

 

군창지 설명판과 유적구조도

 

 

 

 

군창지

 

 

 

 

 

 

 

 

 

부소산성 수혈거주지

 

 

반월루

 

 

 

반월루에서 보는 풍경

 

 

 

 

사자루

 

 

사자루에서 보는 풍경

 

 

백마장강 현판

 

 

 

사자루에서 보는 백마장강의 풍경

 

 

 

백화정

 

 백화정은 부소산 정상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위치한 육모정이다. 이곳에서 백마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름만으로는 100가지 꽃이지만,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궁녀를 생각하면, 백화는 곧 궁녀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정자에 올라 넓게 펼쳐진 강 풍경에 시원함을 느끼다가도 금방 그 옛날 부여를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 아름다운 백화가 강물이 되어 흐른 곳이다.  이곳은 백제 역사의 흥망과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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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설명과 주변

 

  예전에는 이 낙화암 바위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전을 고려하여 목책을 둘러 놓았다. 그저 여기가 낙화암이라는 설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좀 더 이곳을 관광객에게 자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낙화암에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 과장이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 믿을 수 있는 숫자인가? 그 때 인구가 얼마인데 궁녀가 삼천명이 몸을 백마강에 던졌다는 말인가? 그러면 몸을 던지지 않은 궁녀까지 포함하면 왕성의 규모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 그저 그러러니 하고 지나가야 한다.

 

 

고란사전경

 

 

 

 

 

고란사보다 더 유명한 고란약수

 

 예전의 멋이 없어졌다. 현대식 정자를 겉에다 지어 약수터를 보호하고 있으나 잘못된 일이다.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인데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고란초가 약수 주위에 자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멋도 없다.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원래의 모습이 파괴되고 있다.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 유명하다. 임금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실 적에 물위에 고란초 잎을 띄웠다.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사릿과에 속하며, 한방에서는 화류병(花柳病)에 즉효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마저 전하는 신비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백마강 유람선 고란사 선착장

 

 백마강 유람선을 탈까? 말까? 하고 잠시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백마강에 왔는데 달밤은 아니지만 유람선은 타야 백마강의 흥취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타기로 했다. 구드래선착장까지 운행한다.

 

 

백마강 유람선 황포돛배

 

 

 눈이 붉어 눈불개로 불리는 물고기로 관상용으로 그물로 막아 기르고 있다.

 

 

 

 

 

 

 

 

유람선에서 보는 백마강

 

 

구드래 선착장

 

 오늘도 구드래 나루터에는 백제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애절한 백마강 뱃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온다. 부소산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쓸쓸하기만 하다.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황포돛배와 운항중인 배

 

 

 구드래선착장에서 부여박물관으로 가려니 거리가 제법 된다.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시간도 아끼기 위해서 택시를 타려고 하니 택시가 없다. 선착장에서 택시를 발견하고 물으니 대기중이라면서 콜을 해서 택시를 불러 준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거리를 운행 중인 택시는 거의 없다고 하며 반드시 콜을 해서 택시를 타라고 한다. 택시를 기다려 타고 부여박물관으로 갔다. 이곳 역시 예전에 보던 곳이 아니다. 부소산성에 있던 구박물관이 더 조형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너무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을 보려고 오지 않았다.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 보고 싶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전경

 

 

 

넓게 자리잡은 박물관 경내

 

 

동남리석탑

 

 

아름다운 동사리석탑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엄청나게 큰 석조가 맞이한다. 엄청나게 큰 돌 내부를 파내어 물 등을 보관하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한다. 옛날에 이 돌을 파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부여석조와 설명팜

 

 

 

 

박물관 소장품

 

 

 

인물무늬 기와(능산리 출토)

 

  드디어 백제금동대향로실에 왔다. 어쩌면 이 것을 보기 위해서 부여에 욌는지도 모르겠다. 무어라 전문적으로 설명할 지식이 없으니 설명은 모두 지식검색으로 찾아보시를...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며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여러 방향에서 보는 대향로

 

 

 

 

 

 

 

 

각 부분을 확대한 모습

 

 

 

너무나 유명한 칠지도

 

 

치미

 

 

서산마애삼존불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다니..... 내가 우리나라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감동을 받은 곳이 그렇게 많지 않는데, 최고의 감동을 받은 곳이 서산마애삼존불이다. 한 20년도 더 된 어느 날,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갔을 때가 아마 오후 1시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햇빛이 삼존불의 얼굴에 비추었는데 그 순간 삼존불의 미소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온화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미소.... 온 세상을 다 정화시키는 미소.....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같이 갔던 일행이 무엇을 보는지 물었을 때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다른 사람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책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던 '백제의 미소'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며 다시 그 감흥을 느끼기 위해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러 가려고 항상 생각 중이다. 그런데 여기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니, 놀라서 다시 보니 모조품이다. 그래도 반갑기가 한량없다.

 

 

 박물관을 나와 정림사지로 향했다. 

정림사지는 부여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정림사 터는 1942년 발굴했을 때에 대평팔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돼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아무런 자취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는 정림사지를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절터 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돌로 세운 탑인데도 나무로 세운 듯이 부드럽고, 실제로 목조탑처럼 기둥과 모서리에 배흘림 기법이 남아 있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목조 건축에서 보이는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했다. 특히 지붕선은 처마를 살짝 들어 상승감을 주어 경쾌하게 마감했고, 전체적인 미감이 목조탑을 보는 것같이 부드럽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5층석탑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탑이 해체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탑이니, 복장(腹藏)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는지는 뒷날의 조사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금석학에서도 중요한 유물로, 오층석탑의 기단부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공을 기록한 대당평제탑(大唐平齊塔)’이라는 글이 낙인처럼 찍혀 오욕을 견디며 긴 세월을 꿋꿋하게 서 있다. 추사도 이 탑의 글자를 배관하고 그 옆에 배관기를 각해 놓았다. 역사의 쓰라린 아픔을 온몸에 새기고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정림사지 전경

 

 

 

 

 

오층석탑의 사면

 

 

 

 

정림사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 표지

 

 

 황량한 정림사를 뒤로 하고 궁남지로 간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정원으로, 삼국사기무왕 35(634) 조의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떨어진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궁남지는 6월경부터 많은 연꽃이 피면 주변을 거닐며 산책하는 재미가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내가 간 5월은 황량하였다. 그래도 인공적인 연못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백제의 숨결을 호흡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궁남지의 여러 풍경

 

 

 쓰라린 역사를 지닌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경치다. 미륵보살상과 탑 하나 덜렁 남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 탑 뒤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무렵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소리,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운 돛단배로 장엄하고 화려한 경치라기보다는 무언가 애수를 자아내는 서글픔이 먼저 우리 가슴에 서며든다. 이 아픔이 서린 백제를 왜 내가 보고 싶었을까?

 

 궁남지를 끝으로 짧지만 부여를 뒤로 두고 공주로 떠난다.